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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17. 2019

10. 9호선과 측은지심

곳간이 텅 비어 인심이 나지를 않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라는 말에 공감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다음에야 내가 살만 해야 남도 살피는 거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말은 "내가 힘들면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도 공감한다.


나는 자리를 잘 양보하는 편이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임산부는 물론이고, 아이와 함께 탄 사람이라든가 짐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리를 잘 양보하는 편이다. 딱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냥 습관적으로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나고는 했다. 그런데 9호선을 타고 나서부터는 양보하기까지 유독 많은 생각을 한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저 정도면 할머니인가?'

'저 할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기운 있어 보이는데?'

'임산부 맞나? 임산부 배지도 없는데 괜히 양보했다가 욕먹지 말고 그냥 앉아 있을까?'


이런 핑계로도 나 자신이 설득되지 않으면 최대한 느릿느릿 짐을 챙긴다. 읽던 책을 다시 가방 안에 넣고, 가방에서 껌을 하나 꺼내서 씹고, 핸드폰을 오른손에 쥐는 동작을 최대한 천천히 한다. 그래 봤자 5초밖에 걸리지 않겠지만 이 5초 동안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내 대신 양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때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저 사람이 양보해 주나 보다. 나는 일어나지 않아도 되겠다.' 하고 말이다.


"아유~ 고마워요~"하는 감사 인사를 들으면 겉으로는 착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에요~" 하지만 실상은 기분이 좋지 않다. 나가 이 자리 위에 앉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생각하면 속상할 뿐이다. 왜 하필 내 앞으로 왔을까 원망스럽기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가 곧 억울해졌다. 왜 아까운 내 자리를 양보하고도 이런 죄책감을 느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날은 출근길에 어떤 여자분이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지러운지 몸을 못 가누지 못했고 9호선 안에서 주저앉을 듯이 무너져 내렸다. 평소에는 평온했던 9호선이 일순간 술렁술렁거렸다. 어떤 아저씨가 그 여자분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매정하게도 아무도 그 여자분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 결국 멀리 떨어져 있던 내가 여기에 앉으시라며 불러서 양보해 줄 때까지 말이다.   


이런 날은 9호선을 타는 것이 특히나 서글퍼진다.


열차 안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가 불쌍하기보다는 짜증이 날 때

내 앞에 앉아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이 피곤해 보이기보다는 얄미울 때  

들고 탄 여행용 캐리어가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거슬릴 때


나는 이럴 때 9호선을 타는 것이 가장 힘들다. 내 몸의 여유가 없어져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말이다. 옆사람에게 짓눌려 가는 것보다 더운 여름날 끈끈하고 불쾌한 냄새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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