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콤 살벌한 죄책감

by 은수달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무겁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내 지하실을 바라보면서 터키옥색 집시 여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움푹한 자리에 몸을 눕혔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인간과 동물의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죄책감이 아닐까. 죄책감의 사전적 정의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감'이다. 하지만 때로 우린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아이가 크게 다쳤을 때 등등.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도 죄책감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오래전, 외할머니가 폐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충격과 함께 미안한 심정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큰 병에 걸렸는데도 미처 몰랐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조금만 더 세심하게 지켜봤다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답지 않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가진 재능이 다른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인데,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건 결핍이자 원망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타인의 죄책감을 교묘하게 이용해 평생 가스라이팅하는 사람도 있다. 효도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자식의 삶에 간섭하거나 이득을 취하는 부모도 있고, 구실을 만들어 집안에 배우자를 가두는 사람도 있다. 때론 쓸데없는 죄책감이 개인을 극한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죽음이나 자해로 책임질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


죄책감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주위를 살벌하게 만들 것인가. 자존감을 갉아먹는 원인을 제거해서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인가.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7화엄중히 감시받는 부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