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울증 환자가 되었다

by 심그미

못 한다, 못 한다, 해도 이렇게 못할 수가 있나.

어질러진 장난감 정리를 하고 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그러니까 바닥에 놓인 장난감의 위치를 수납장 안으로 옮기는 일만 두 시간 했다는 말이다. 장난감을 치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소파에 누워 놀다가, 이대로 잠들면 안 돼,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이 물건들을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그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 5분 더 썼다.

시간에 쫓기진 않는 상황이지만, 쫓긴 듯 아껴 쓰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도 중요하니까. 그러나 잠을 미루고라도 오늘의 집안일을 오늘 해 두는 것, 그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중요한 성실함이다. 때로 자다가 깨어 잠을 설칠 때 어제의 집안일을 지금이라도 해 두는 것, 그 역시 가족을 위한 성실함이다. 래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

안 평범한 노력을 해도 평범함에 못 미친다.


나는 ADHD인 게 분명하겠지. 이 치료를 받은 누군가는 평범한 사람의 삶이 이런 건가를 생각하며 울었다던데, 나도 약물을 먹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느끼며 울고 싶다.

나를 고치고 싶다.

정신과의원을 찾아갔다.


진료 1.

예약에 맞춰 찾아간 곳에서 문진표를 작성했다. 인터넷에서 종종 하던 우울증 자가테스트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초진 방문자에게는 이 문진표와 뇌파 검사를 기본으로 진행한다고.

EEG라는 뇌파 검사를 5분 정도 받았다.


뇌파 검사지에서 내 뇌는 델타파 기준으로 노란색이었다. 다른 파는 대체로 정상이었다.

인지 기능이 100 중에 13 정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인지기능, 집중력이 많이 안 좋네요.

안 좋아서 왔는데 안 좋은 상태라니 다행이군.

나는 ADHD검사를 받고 싶다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 검사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 생활기록부를 떼 오라고 했다.

학력과 현재 직업을 물어서 대답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지 않나요? 진단 전에 먹을 수 있는 약도 있어요. 처방해 줄까요?

-오자마자 콘서타 같은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진료 2.

약은 진단 후에 먹기로 하고 일주일 뒤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들고 병원에 다시 갔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는 인터넷으로 인쇄할 수 없더군요.

-초등학교가 가장 중요한데요. 다음번에는 꼭 가져오세요.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쭉 읽은 의사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따뜻하고 상냥하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죠?'라고 물으면 신기하게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말했다. 20대 때 겪은 방황도.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에 대해서도. 질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성교제를 얼마나 길게 했는지도 답했다. 남편과의 관계, 내가 울적해질 때 남편은 어떻게 나를 도와주는가(별 것 하지 않는다), 자녀와의 관계는 어떤가 등.


-생활기록부에서도 ADHD를 의심할 부분이 없고, 애착관계도 문제없는 듯해요. 우울증은 확실한 듯하니 그걸 먼저 '걷어내' 보도록 하죠. 이 약이 집중력도 조금 개선시켜 줄 수 있어요.


약을 처방받았다.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도파민 관련 약물이었다. 먹기 시작하고 삼일 째, 확실히 달라짐을 느꼈다. 그날이 주말이었고, 두 아이 중 하나는 낮잠에 들고, 나머지 하나는 아빠와 같이 산책을 나갔다. 세 시간 정도 집에서 자유롭게 보낼 시간이 생겼다. 이런 시간이 생길 때마다 나는 바닥의 장난감을 겨우 치우다가 누워있곤 했는데, 이날은 달랐다. 장난감 정리를 마치고 저녁에 먹을 밥과 반찬을 세 가지나 새로 만들었다. 주어진 시간은 비슷했는데 훨씬 많은 것을 해냈다. 남편이 아이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 나는 반찬을 완성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청소기로 바닥을 돌리기 직전이었다. 집이 훨씬 쾌적했다. 일상을 사는 나의 소소한 성취감도 컸다. 이 주말 이후 나는 내 약이 마음에 쏙 들게 되었다.

밀크씨슬, 아르기닌, 헛개즙, 비타민B... 그동안 돌아가며 사 먹던 피로회복제보다 이 작은 알약이 가져다준 효과가 훨씬 컸다.


우울증을 고백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동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진단을 받고 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이제 내가 그걸 시작한다. 좋은 소식이다.


나는 치료를 시작한 나 자신이 몹시 기특해졌다.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고, 약속된 시간에 병원을 가는 내가 기특하다.

이제야 20대의 병들었던 나에게 진짜로 필요했던 조치를 시작하는 것 같다. 그때로부터 아직까지 헤어 나오지 못한 나를 내가 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을 사는 내가 20대의 나를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늘 죄책감과 후회를 가슴 한편에 껴안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진정한 의미로 과거를 향해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올해 시작한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을 꼽으라면, 나 스스로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잘하고 있다, 나 참으로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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