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에 꽃소식이 들리더니 우리 동네 아파트 화단의 산수유와 매화도 아랫마을 못지않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볕이 따뜻해지니 온몸이 들쑤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이게 된다. 춥다고 내다보지도 않던 베란다의 창문도 열고, 겨우내 묵은 먼지도 털어내고 시원하게 물을 뿌려가며 청소도 해본다. 바닥에 물기를 말리고 나서 집 안에 들여놓았던 화분들도 베란다 제 자리를 찾아준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메줏덩어리가 든 보자기를 들고 집으로 오셨다. 내 방에서 며칠 묵으시는 동안 방 안에는 늘 쿰쿰한 메주 냄새가 떠돌았다. 봄이 되기 직전에 할머니의 지휘 아래 장을 담그는 것은 우리 집의 연례행사였다. 엄마는 낮이면 그렇게 담가 놓은 장 항아리의 뚜껑을 바람이 잘 통하라고 열어두곤 하셨다.
간장을 담가 놓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어쩌다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고, 마침 내가 술래가 되어 꼭꼭 숨어버린 동생들을 찾으러 다녔다. 집 안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다 장독대에 숨어 있던 막내를 발견했다. 소리를 죽여 다가가는 순간 막내는 더 깊숙이 숨으려다가 열어놓은 항아리 뚜껑을 밟아버렸다. 뚜껑과 함께 동생이 미끄러지며 동시에 간장독이 쓰러지고 항아리들은 도미노처럼 넘어갔다. 간장이 마당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메줏덩어리와 깨진 항아리들이 질펀하게 마당에 널려 버린 것은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빗자루로 어지간히 매를 맞았고, 간장 냄새가 배어있는 옷을 입은 채로 대문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밤이 늦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도록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도, 장난을 치며 낄낄댔다.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저 신나고 즐거운 것투성이였다.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도 없고, 심심하지도 않고, 그 시절의 우리 자매들은 같은 꿈을 꾸며 같은 이유로 웃을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고 우리는 모두 셈이 빠른 어른이 되었다. 야단을 맞고 쫓겨나서도 함께 낄낄거리던 순수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별 볼 일 없는 집 한 채를 두고 서로의 시커먼 뱃속을 드러내며 싸우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돈 몇 푼에 심한 말이 오가고, 서로의 가슴에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며 날을 세웠다. 이제 우리 자매들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피를 나눈 자매인데 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소식을 끊고 사는지 오래다.
처음 얼마간은 괘씸했었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살아나는 날들도 있었으나 시간이 약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미움과 분노의 감정도 차츰 가라앉고 오늘처럼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 담다가 유년의 어느 봄날을 떠올리기도 하게 되었다.
언젠가 우리도 화해하는 날이 있을까, 누구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예전처럼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모처럼 맑은 바람을 쐬자 축 늘어져 있던 초록의 잎사귀들은 싱싱하게 살아난다. 우리 자매의 관계도 저렇게 되살아나면 좋겠다. 불현듯 동생들이 못내 그립다.
나는 대학의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박봉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교육열 강한 어머니는 대도시로 이사 온 후 기어이 나를 그곳에 집어넣은 것이다. 입는 옷이며 도시락의 반찬이며 반의 아이들이 사는 모습은 우리 집과 너무 달랐다. 돈 많은 집 아이들 틈에서 나는 늘 주눅 들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어린이날 무렵이면 예능 발표회를 했는데, 대표적인 행사는 교내 합창대회였다. 학급 대항의 합창 대회는 모두가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한복이 있을 리 없고, 지금처럼 한복 대여점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합창 대회 전날이면 나는 한복을 빌리러 같은 도시에 사는 큰댁에 가야 했다. 어린 내 눈에 으리으리하게 큰 그 집에는 나의 엄마보다도 젊은 소실과 나와 동갑내기인 사촌과 큰아버지 셋이 살고 있었다. 하늘하늘하고 선녀의 날개 같은 그 아이의 분홍색 한복을 빌리러 가면, 나는 신다 내버린 신발처럼 구차한 자세로 현관에 선 채 사촌의 짜증을 듣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것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 있으면 견딜 만했다. 그것보다 더 굴욕적인 것은 한복을 돌려주러 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한복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냄새를 맡아보고 온갖 트집을 한참이나 잡았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귓속에서 열이 확확 나는 것 같은 수치심을 견디며 대문을 나서면 눈물이 핑 돌았다. 매번 이런 꼴을 당하게 만드는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아버지가 미웠다. 무능력하면서도 욕심만 많다고 엄마를 욕하며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 며칠이고 퉁퉁 불어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한복을 빌리러 큰댁에 나를 보내는 엄마의 마음을.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를 먹고 보니, ‘남들 앞에서 자식 기 안 죽이려고 당신보다 어린 손윗동서에게 비굴하게 아쉬운 소리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와 싸울 때면 내게 해준 것이 뭐냐고 소리를 지르며 대들곤 했는데, 막상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사람 노릇 하도록 키워내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아직 남들에게 손가락질 안 당하고 살아온 것은 모두 내 부모가 키워준 덕이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맘을 안다는 옛말처럼, 내 자식을 키우며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서운한 마음도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엄마가 옆에 없다.
잎사귀 다 떨구고 죽은 듯이 지내던 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떠나간 사람들도 다시 돌아와 저 나무들마냥 푸르게 내 옆에서 함께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된 이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다정하게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