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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Sep 30. 2020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어

  안다, 나보다 엄마가 더 힘들었을 거라는 것을.

  대장에서 생겨난 암세포가 늑막을 거쳐 혈액까지 퍼진 말기암 환자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은 한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부리는 변덕과 무작정인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여섯 명이 함께 쓰는 요양병원의 조그만 병실에서 앙칼지게 짜증을 내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날도 별 것 아닌 일인데, 침대에서 일으킬 때 조심성이 없다, 다른 자식들은 안 그런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하도 짜증을 내시길래 같이 화를 내고 기어이 병원을 나와버렸다. 새벽부터 오기를 기다렸는데 아침밥을 다 먹고 난 후에 왔다는 데서 이미 엄마 마음은 틀어져 있었다. 나도 할 말은 있다. 새벽 여섯 시 반에 집을 나서서 밤 열 시가 넘어 들어오는 직장 생활은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살림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직장에 나가는 엄마의 아침이 얼마나 바쁜지. 정신없이 아침상을 차려놓고 날이 밝기 전 집을 나서면 고속도로를 한 시간을 달려야 사무실에 도착한다. 늘 시간과의 전쟁을 벌이며 살다 유일하게 시간에서 자유로운 날이 휴일이다. 그런데 간병인도 있건만 새벽부터 오라는 것은 자식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이기심일 뿐이라는 생각에 나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오랜 병원 생활로 환자나 가족이나 지쳐, 있는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직장 생활에 간병에 힘든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서운한 것이 자꾸 곱씹어졌다. 평소에는 아무리 늦어도 병실에 들려 잠든 엄마 얼굴을 봤지만 며칠을 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번엔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마음 약하고, 화를 오래 담지 못하는 바보같은 내 성격을 엄마는 늘 이용해왔다고 생각했다. 맏이가 돼서 나 몰라라 하면 어쩌냐고 동생들이 번갈아 전화로 따졌다. ‘맏이, 맏이니까’라는 말은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 말의 무게는 내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 중 가장 무거웠다. 맏이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부담. 권리는 없고 강요와 의무만 존재하는 삶. 가족들이 그동안 나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나라고 맏이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막냇동생처럼 부모에게 응석도 부리고 엄살도 부리는 그런 자식으로 살고 싶었다. ‘참을성 많고 입이 무거운’ 맏이는 나의 부모가 입혀놓은 이미지였다. 그것은 무서울 때도 아플 때도 입을 다물게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다. 나는 실수도 잘못도 용납되지 않고 언제나 굳건해야 하는 맏이였다. 씩씩한 척, 잘 지내는 척, 쾌활한 척 살아오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는 풀지 못한 상처들이 흉측한 딱지가 되어 겹겹이 쌓여있었다.


  보고 싶어 하신다고, 병원에 오라신다고 간병인이 전화를 했지만, 사과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른 자식들이 다 명절 쇠러 시댁에 가고 나니 이제 와서 내가 아쉬운 거라고 옹졸한 마음으로 버티며 엄마와 기 싸움을 했다. 엄마 혼자 외롭게 병실에 버려두고 추석을 지나버렸다. 미안한 마음과 걱정되는 마음으로 추석 연휴가 지난 후 찾아갔을 때 엄마는 아무도 못 알아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가고 사그라들어가는 목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버티다가 엄마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바보같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엄마에게 그닥 사랑받는 자식이 아니었다. 내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말을 가르친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길에서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사람도, 불덩이 같은 이마에 찬 수건을 올리고 밤을 지켜주는 사람도 할머니였다. 엄마와 함께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은 그 몇십 배의 마음의 거리를 우리 모녀 사이에 벌려 놓았다. 엄마와 함께 산 이후로 어른이 되어서도 쭉 나는 엄마와 살이 닿으면 깜짝 놀라 떨어지곤 했다. 엄마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를 안아주거나 한 적이 없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아플 때도,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었을 때도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고 등 한 번 쓸어준 적 없다. 


  그래도 살면서 힘에 부칠 때면 다정하게 맞아주지 않아도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다.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날이 많았고, 깊은 밤 불현듯 삶이 무서워질 때 엄마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우리는 대화가 잘되지 않았고 늘 서로의 마음을 오해했다. 


  엄마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인지, 사랑하는 자식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다 풀어내고 엄마와의 케케묵은 감정을 정리했어야 했다. 그럴 시간이 올 줄 알았다. 엄마와 풀어야 할 것이 많은데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어쩌면 엄마도 나처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혼자 잘난 척 강한 척하지 말고, 외롭다고, 슬프다고 말해주기를. 생각처럼 나는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손 내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내게 곁을 안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엄마에게 곁을 안 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내 가족 특히 엄마에게는 옹졸하고 째째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열흘을 의식 없이 누워있다가 엄마는 떠났다. 나를 보고 싶어 했던, 그리고 나를 볼 수 있던 그 날, 엄마에게 갔어야만 했다. 엄마를 사랑한다고, 늘 엄마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나를 알아볼 수 있던 그 마지막 날 어쭙잖은 자존심 따위 버리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했어야 했다.

 


  떠나시기 전날, 귀에 대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나직이 물었고, 비록 아무 의식이 없었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믿는다. 또 추석이 다가온다. 나는 어김없이 후회와 죄책감으로 명절 내내 아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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