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한다. 똑같은 리본도 재주 있는 사람의 손길이 스치고 가면 매듭이 통통한 게 예뻐진다. 그런 사람들은 꽃 한 송이를 꽂아도 멋스러운 것이 내가 꽂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나는 그런 손재주가 전혀 없다. 손길이 야무지지 못하고 어설퍼서 무언가를 만지면 엉성한 것이 꼭 표가 나고 만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스케치도 내가 하면 형체를 알 수 없는 괴기한 4차원의 형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체육 시간에 뜀틀 넘기를 한 적이 있다. 한 명씩 달려나가서 뜀틀을 넘은 후 매트에서 구르고 일어나 손을 양옆으로 쫙 뻗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런 활동은 곧잘 하는 편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하필 마음에 두고 있던 남학생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몸이 뻣뻣해지고, 입꼬리가 경직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날 그 친구의 시선을 의식한 순간부터 달려나가는 다리는 자꾸 엉켜서 넘어질 것만 같더니 결국 뜀틀을 넘지 못하고 구름판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반의 친구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선생님은 다시 뛰라고 했으나 본의 아니게 이목이 집중된 후 끝내 나는 뜀틀넘기를 성공하지 못했다. 부끄러웠던 그 순간의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 일 이후 나는 운동마저 젬병인 아이가 되고 말았다.
재능이 없어도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하면 실력이 늘 수도 있을 텐데 당최 나는 끈질기게 무엇인가를 배워 보려는 열정 자체가 없는 편이다. 특기도 없고 끈기도 없고 열정마저 없는 내가 그나마 오래도록 하고 있는 일은 책 읽기이다. 타인 앞에서 쉽게 움츠러들고 특별한 재주도 없으며 이해력도 부족한 나에게도 곁을 내준 유일한 존재가 책이다.
어머니가 첫 아이를 사산한 후 바로 들어선 나는 살아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쉽게 젖살이 오르지도, 쑥쑥 자라지도 않는 볼품없는 아이였다. 채 크지도 못하고 죽을 것을 염려한 외할머니가 나를 거뒀고,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야 부모님이 본가로 데리고 왔다. 나의 집이라고 해야 할 곳으로 온 후 할머니의 늘어지고 쭈글쭈글한 젖을 만지며 잠이 들던 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사는 생활은 낮이건 밤이건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연년생인 여동생 둘은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는데 그들의 세계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나는 그들의 놀이에 끼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주변만 빙빙 돌 뿐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이상스럽게도 집의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했고, 방학이 시작되어 외가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 친구가 월부책 장사를 시작했다며 남의 부탁을 거절 못 하는 아버지가 세계 명작, 한국 단편 문학, 세계문학 따위의 전집을 잔뜩 들여놓으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일로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셨고, 그 책들은 집에 들어온 순간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나의 집은 이 층짜리 양옥이었는데 말이 이 층이지 옥상에 다락방 하나가 달랑 있는 집이었다. 삼각형의 뾰족한 다락방은 어른은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고, 한여름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곳으로 허드레 물건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그 방은 주로 내가 학교 숙제를 하거나 드러누워 공상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문제의 그 책들은 눈에 띄지 않게 치워버리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다락에 처박히게 되었다. 그 수많은 책의 더미에서 내가 처음 발견한 책은 『소공녀』였다.
대령의 딸로 유복하게 살던 주인공이 아버지의 사망 이후 다니던 기숙학교의 하녀 일을 하며 천대를 받지만,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동화적인 줄거리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천애 고아가 되어 천대받는 주인공의 모습은 외가를 떠나와 눈치 주는 사람 없어도 눈칫밥을 먹고 있는 나의 처지와 기막힐 정도로 닮아 있었다. 동화의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나에게도 이방인 같은 어색함과 이질적인 소외감으로부터 구원해줄 누군가가 나타나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불 꺼진 방에 누워 책의 장면에 내 모습을 끼워 넣어 상상하는 즐거움은 큰 것이었다.
은밀한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난 후 더는 외롭지 않았다. 하루를 그럭저럭 보내다가도 저녁 어스름이면 슬금슬금 찾아오는 외갓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글퍼지던 시간을 위로해주고 메워줄 대상이 생긴 것이다. 집에 와서 살고 있으나 집에서 버려진 모순된 상황에서 분리불안의 공포로 보내던 불면의 밤을 더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다. 함께 사는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서러움과 외로움은 책 속에서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애써 말 붙여보려 하지 않아도, 어색하게 웃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가 내게도 생긴 것이다.
나의 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에는 집에 있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어린이 세계 명작에서 시작해서 2단의 세로쓰기로 되어있는 한국 단편 문학, 세계문학 전집도 무턱대고 읽어댔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았으나 가족 속에 섞이지 못한 채, 웃고 떠드는 그들을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백배 더 수월한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 더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오는 동안 사람에게서, 세상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상처받는 순간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마음의 순발력이 더딘 편인 나는 받아치지 못하고 뒤늦게 반박할 말들이 떠올라 분통이 터지거나, 무심코 던진 말에 마음의 딱지가 다시 떨어져 진물이 나기도 했다.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서 가는 것이 내게는 버겁고 고단한 일이었는데, 막막하고 힘겨운 하루의 끝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 책을 펼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앞에선 씩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쓸 필요 없이 진솔한 나의 맨얼굴을 내놓고 눈물을 흘려도 흉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잉여의 시간을 만날 때도 나는 책을 펼치는 것 외에 달리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지만 나는 책을 펼쳐 들고 있어야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책은 나를 위로해주는 동시에 낯선 시선과 낯선 분위기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보호자인 것이다.
무언가에 즐거이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이 취미 생활이라면 나의 취미 생활은 책 읽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유달리 지적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진리를 탐구하려는 학문적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서툴면 서툰 대로 마주하고 알아가도록 허락해준 유일한 대상이 책이었을 뿐이며, 책과 함께 있는 그 시간만큼은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