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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상한 동료애

리더십

by 마음을 잇는 오쌤


구 과장이 ‘구 팀장’이라 불리기 시작한 건,

조직 개편 이후 우리 쪽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거, 내가 해볼게요."


처음엔 고마웠고, 조금 낯설었다.

이 조직에서 누가 나서서 내 일을 덜어간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전에는 ‘우리 팀’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진짜 팀 같았다.






신제품 개발


ATM 교체 주기를 맞춰 회사는 신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나와 구 과장은 디자인에 총력을 쏟았다.

나는 지난 콘셉트와 같은 흐름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터페이스를 제안했다.


최근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도 있었고,

분위기도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휠체어 사용자의 접근이 쉬운 ATM”

구 과장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이 콘셉트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실제 개발까지 이어졌다.


ATM 전면의 터치 모니터를 거리를 줄이고,

휠체어의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아랫부분의 깊이를 늘렸다.

비밀번호를 누를 땐,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모니터로 보여주는 기능도 넣었다.

결과는 꽤 괜찮았다.

영업 회의에서 호평을 받았고,

영업팀은 이 콘셉트를 앞세워 은행 납품 경쟁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구 과장의 마음

회의가 끝난 날, 자판기 앞에서 마주친 구 과장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오쌤, 성 과장 나간 이후로… 일하는 게 아니라 전쟁하는 기분이야."


나는 대답 대신 커피 버튼을 눌렀다.

컵이 내려오는 속도만큼 말이 늦게 흘렀다.


"과장님, 여기선 그게 ‘일’인 줄 알았잖아요."


하루는 그가 내 디자인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대학원 나왔다고 생각이 정리되진 않잖아.

근데 오쌤은 다르게 하려 하네. 방향이 보여.

그건 쉬운 거 아니야."


무심한 듯 다정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인정받고 싶던 순간이었고,

그 말은 내가 한동안 버티게 만든 버팀목이 됐다.


그는 가끔 나보다 더 내 일을 걱정했고,

어쩔 땐 내가 말 안 해도 내 기분을 먼저 알아챘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조금 부담스러웠다.


"오쌤, 내가 보기엔 너무 앞서가.

그러다 뒷통 수 맞아."


"뒤에서 맞아도 앞으로 가야죠.

여긴, 가만히 있어도 결국 맞는 데잖아요."


성 과장이 떠난 후,

사무실엔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구 과장은 그 틈을 조용히 메꿨다.

회의 때도, 커피 타임에도,

팀장이 빠진 프로젝트의 조율자 역할도

그가 해냈다.


나는 어느새 그가 옆에 있는 걸 당연하게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을 꺼냈다.


"오쌤, 나 다음 주부터 회의에 빠질지도 몰라."


"왜요? 조직 개편이에요? 팀 옮기세요?"


그는 한 박자 쉬었다가, 웃었다.


"아니, 그냥… 빠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 말 안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말이 줄었고,

디자인 피드백도 조금씩 흐려졌다.






신제품 출시



새 ATM이 출시됐다.

휠체어 접근성으로 호평을 받았고,

은행 납품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내 디자인이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구 팀장의 도움 덕분에

디자인 등록증에 내 이름이 새겨졌다.


“창작자: 디자이너 오쌤”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성취감도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하나 남았다.


그때 제안했던 또 하나의 기능.

‘후방 보안 인터페이스’는 실제 제품에 반영됐지만,

특허 등록엔 내 이름이 없었다.


대신, 개발자의 이름으로 올라갔다.


구 팀장의 의도는 아니었다.

특허는 ‘아이디어’보다 ‘실행’의 영역이었고,

실제로 구현한 사람만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디자인에 내 이름을 붙이려면,

디자인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걸.

제도도, 기술도, 계약도 알아야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걸.






에필로그: 좋은 팀.

그는 디자인팀을

‘진짜 팀’

처럼 느끼게 한 몇 안 되는 팀장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됐다.

좋은 팀이란,

제도로 만든 게 아니라,

‘마음이 연결된 사람’을 말한다는 걸.


(다음 편 : 희망퇴직)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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