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구 과장이 ‘구 팀장’이라 불리기 시작한 건,
조직 개편 이후 우리 쪽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거, 내가 해볼게요."
처음엔 고마웠고, 조금 낯설었다.
이 조직에서 누가 나서서 내 일을 덜어간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전에는 ‘우리 팀’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진짜 팀 같았다.
ATM 교체 주기를 맞춰 회사는 신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나와 구 과장은 디자인에 총력을 쏟았다.
나는 지난 콘셉트와 같은 흐름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터페이스를 제안했다.
최근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도 있었고,
분위기도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휠체어 사용자의 접근이 쉬운 ATM”
구 과장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이 콘셉트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실제 개발까지 이어졌다.
ATM 전면의 터치 모니터를 거리를 줄이고,
휠체어의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아랫부분의 깊이를 늘렸다.
비밀번호를 누를 땐,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모니터로 보여주는 기능도 넣었다.
결과는 꽤 괜찮았다.
영업 회의에서 호평을 받았고,
영업팀은 이 콘셉트를 앞세워 은행 납품 경쟁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회의가 끝난 날, 자판기 앞에서 마주친 구 과장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오쌤, 성 과장 나간 이후로… 일하는 게 아니라 전쟁하는 기분이야."
나는 대답 대신 커피 버튼을 눌렀다.
컵이 내려오는 속도만큼 말이 늦게 흘렀다.
"과장님, 여기선 그게 ‘일’인 줄 알았잖아요."
하루는 그가 내 디자인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대학원 나왔다고 생각이 정리되진 않잖아.
근데 오쌤은 다르게 하려 하네. 방향이 보여.
그건 쉬운 거 아니야."
무심한 듯 다정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인정받고 싶던 순간이었고,
그 말은 내가 한동안 버티게 만든 버팀목이 됐다.
그는 가끔 나보다 더 내 일을 걱정했고,
어쩔 땐 내가 말 안 해도 내 기분을 먼저 알아챘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조금 부담스러웠다.
"오쌤, 내가 보기엔 너무 앞서가.
그러다 뒷통 수 맞아."
"뒤에서 맞아도 앞으로 가야죠.
여긴, 가만히 있어도 결국 맞는 데잖아요."
성 과장이 떠난 후,
사무실엔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구 과장은 그 틈을 조용히 메꿨다.
회의 때도, 커피 타임에도,
팀장이 빠진 프로젝트의 조율자 역할도
그가 해냈다.
나는 어느새 그가 옆에 있는 걸 당연하게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을 꺼냈다.
"오쌤, 나 다음 주부터 회의에 빠질지도 몰라."
"왜요? 조직 개편이에요? 팀 옮기세요?"
그는 한 박자 쉬었다가, 웃었다.
"아니, 그냥… 빠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 말 안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말이 줄었고,
디자인 피드백도 조금씩 흐려졌다.
새 ATM이 출시됐다.
휠체어 접근성으로 호평을 받았고,
은행 납품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내 디자인이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구 팀장의 도움 덕분에
디자인 등록증에 내 이름이 새겨졌다.
“창작자: 디자이너 오쌤”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성취감도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하나 남았다.
그때 제안했던 또 하나의 기능.
‘후방 보안 인터페이스’는 실제 제품에 반영됐지만,
특허 등록엔 내 이름이 없었다.
대신, 개발자의 이름으로 올라갔다.
구 팀장의 의도는 아니었다.
특허는 ‘아이디어’보다 ‘실행’의 영역이었고,
실제로 구현한 사람만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디자인에 내 이름을 붙이려면,
디자인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걸.
제도도, 기술도, 계약도 알아야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걸.
그는 디자인팀을
‘진짜 팀’
처럼 느끼게 한 몇 안 되는 팀장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됐다.
좋은 팀이란,
제도로 만든 게 아니라,
‘마음이 연결된 사람’을 말한다는 걸.
(다음 편 : 희망퇴직)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