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팀장
새로운 등장인물
지 사원 (LEVEL -1)
“그림자처럼 조용하지만, 든든한 사람.”
말도 적고, 티도 안 나지만 자기 일은 확실하게.
유쾌하고 묵묵한 성실캐.
눈에 잘 안 띄지만, 없으면 허전한 존재감.
구 팀장의 리더십이 인정받은 것 같다.
소장님의 지시로 기업의 디자이너는 한 팀에 있어야 한다며 건물 2층에 마련된 사무실에
디자인팀을 만들어 놓고 디자인팀을 관리하셨다.
구 팀장, 도대리, 나, 그리고 지 사원.
지 사원은 과거 도대리와 성 과장 간의 갈등 이후, 도대리가 그만 둘 상황을 대비하여 시각 디자인 파트에서 채용한 도 대리 부사수였다.
그렇게 디자인팀은 독립 부서와 같은 느낌으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 자유로운 근무환경, 사무실 하나를 팀이 사용하고 있어 회의실이 따로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이 회의였다.
엔지니어도 없고, 창의적인 존재 4인이 모인 공간 디자인 전문회사 같이 자유로 웠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우리 팀을 사랑했다.
회사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지난번 신입 회장님 취임 이후 거대한 변화였다.
“일본 KM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MOU 체결했어요.”
“생산량 증가가 예상되어 본사를 김포로 이전합니다.
희망퇴직은 선택입니다.”
그날 회의실 공기는, 에어컨도 못 이길 만큼 차가웠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경기도로… 본사를 이전하다니
회사의 급작스러운 합병 발표와 본사 김포 이전의 사실을 믿기 힘든 직원들은 사실을 희화시키려고 농담 삼아 말을 했다.
“이전 주소가 어디야? 시골이라며”
“어 회사 이전 주소는 경기도 어디냐 면 무지 멀 리 야”
지난 신제품 출시 이후 매출도 좋아지고, 회사가 새로운 동력을 얻기 위한 MOU인데,
보통 그런 자리에선 ‘도약’ , ‘수고 많았다’는 말이라도 오가는데,
그날은 모두가 눈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인수한 건지, 인수당한 건지—
보도자료엔 우리가 주도했다고 쓰여 있었지만,
정작 주도권은 점점 저쪽 손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무실은 이사하고, 조직은 개편되고, 합병하는 회사에 디자이너도 합류했다.
직책은 늘었고, 보직도 늘었다.
사람이 두 배가 되었다.
예상했지만 그만큼, 감축 대상도 생겼다.
희망퇴직 리스트는 그렇게 조용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씩씩 거리며 자리로 돌아온 구 팀장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자리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며, 화분의 말라버린 나뭇잎을 하나씩 떼어냈다. 한참 말이 없었다.
디자인팀은 정막이 흘렀다. 익숙해질 때쯤 구 팀장이 내게 말했다.
“합병에 이사도 믿기 힘든데 새로운 디자이너?...
오쌤, 내가 왜 여기에 디자이너로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에 나는 대꾸 대신 커피잔을 돌렸다.
“과장님, 그건 저도 매일 느끼는 거예요 ㅠㅠ.”
구 팀장은 한동안 조용했다.
회의에서도, 피드백에서도, 목소리가 줄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떠났다.
본부장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했다.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담하게 말했다.
“이쯤이면 할 만큼 한 것 같아. 그래도, 오쌤.
회사에 기대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
그리고 나중에 우리 진짜로, 한 번 같이 하자.
제대로 팀 한번 만들어보자”
그 말이 작별처럼 들리지 않았던 건,
아마 나도 같은 꿈을 꾸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구 팀장이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가던 날,
그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커피 잔은 그대로였다.
마치 다음 날도 출근할 것처럼.
사무실은 다시 평온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안정’이 아니라 ‘정적’이었다
네 자리가 있었지만, 그날 이후 늘 셋만 앉았다.
구 팀장의 퇴직으로 이번에도 나는 퇴직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어쩌지?
살아남은 자의 마음이 더 허하다.
아무도 없는 팀장 자리에 놓인 빈 컵 하나가,
출근할 때마다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디자인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되었다.
디자인은 이제 '일'이 아니라 '생존'이 되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마도, 구 팀장이 떠난 그날부터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 편 : 혼자 남은 나)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