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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10층과 9층 사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전쟁 (두 번째 권고사직)

by 마음을 잇는 오쌤

새로운 등장인물

서 부장 / (LEVEL 1)

“앞에 있지만, 앞서지 않는 사람.”

정장은 단정했고,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리더보단 관리자에 가까웠고,

지시는 없지만 회의는 길었다.

권력은 가졌지만 휘두르지 않았고,

실수는 있었지만 모른 척은 하지 않았다.

염치는 있었지만, 리더십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그를 미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르지도 않았다.











아침은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느렸고, 모닝커피는 여전히 탄 맛이었다.

성 팀장은 또 일찍 와 있었다. 늘 그랬다.

모니터엔 어제 그대로 멈춰 있는 도면 파일.

그리고… 말 안 해도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공기부터 좀 달랐다.

같은 팀이던 도 대리는 지난번 사건 이후,

성 과장과는 같이 일하기 어렵다는 실장님의 판단으로

소프트웨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성 팀장의 흔들림이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 구 과장이 올라왔다.

회의 때문도 아니고, 그냥 제품 스펙 확인하러 잠깐 들른 거였다.

나는 반가워서 인사했고, 자료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지난번 실장님이 말한 모델 스펙인데요,

여기에 맞춰야 할 것 같아요."


"오~ 정리 잘했네"

구 과장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대화였는데,

이날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성 팀장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말은 없었지만, 정적 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팀 안의 균열에 이어, 10층과 9층 사이,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쌤, 해외사업부 디자인 구 과장한테 공유받은 거 있어요?"

"왜 구 과장은 공유가 안 되는 거야? 이 사람 왜 이래?"


질문 같지만, 실은 경고였다.

성 팀장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흐름에 예민했다.

그리고 구 과장의 존재는 점점 불편하고,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두 상사가 대립하면, 중간 직원은 등 터진다.

괜히 웃었다가 괜히 말 걸었다가… 오해의 다리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난 ‘오 새우’가 되어 두 분 사이에서 하루하루 눈치 백 단으로 살아가야 했다.












조직개편



회사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안에서는 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구 과장의 입사 동기였던 서 부장이,

사실은 회장님이 직접 들여온 인물이었다.

내부 개편을 위한, 일종의 언더커버 보스.


해외개발팀은 해체되고,

해외와 국내 개발팀이 통합됐다.

디자인팀은 성 팀장 중심으로 재편됐고,

구 과장과 나는 함께 일하게 됐다.


내 마음고생은 예정된 미래였다.











누가 잘할까?


숨죽인 사무실.

나는 말 한마디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회장님의 콘셉트 디자인 지시가 떨어졌다.

디자이너 3명의 실력을 직접 보고 싶다며 디자인 배틀을 붙이셨다.

한 달 뒤, A3 용지에 출력해서 회장님에게 대면 보고했다.


성 팀장은 현실적인 "양산형 ATM"

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설 ATM"

구 과장은 알루미늄 감성의 "스타일리시 ATM"


회장님의 반응은 흥미롭다고만 했다.

딱 거기까지.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뭔가… 허무했다.


그리고 새로운 인사가 들어왔다.

기술연구의 소장으로 부임한 서 부장.

소장님은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자주 우리 팀에 올라와 성 팀장을 만났다.


문제는 성 팀장이 자리에 없는 날이 많았다는 것이다.

3번 오면 1번 만날까 말까.

소장님은 빈자리를 보고 고개를 살짝 젓고 내려가곤 했다.




그런 소장님의 관심과 잦은 업무 지시 때문인가?

성 팀장의 불만이 시작됐다.


"나만 일하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겼다.

왜냐면 나도 그 생각,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는 늘 뭔가를 "맡았다"라고 했는데,

그게 이상하게 내 일로 돌아왔다.

맡음이 아니라, 전달이었다.


어느 날엔 내 디자인이 성 팀장의 성과로 보고됐다.

“이건 뭐지?”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성 과장도 심 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은 내가 했고, 보고는 그가 했다.


"이거 오쌤이 한 건데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침묵.

그건 그냥 무시였다.


그는 스스로를 팀장이라 여겼지만,

도 대리도, 구 과장도, 나도

그의 팀이 된 적은 없었다.


그는 팀장이 아니라,

관성에 기대어 서 있던 오래된 기둥 같은 존재였다.

심 팀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마, 권고사직?


그날도 아침은 평소와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느렸고, 커피는 여전히 탄 맛.


성 팀장이 회의실로 우리를 조용히 불렀다..



"예상했을 거예요.

이번에 구조조정 있어요. 각 팀마다 한 명씩 나가야 해요."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누가 나갈래요? 구 과장? 아님 오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또 나야? 이번에는 진짜 이해 못 해!!"


그런데 성 팀장은 씩 웃더니 말했다.

"걱정 마요. 내가 나가기로 했어요."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왔다.

천만다행이었다.


"오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남은 시간 동안 마무리 잘할게요. 인수인계는 걱정 말고."


그 순간, 그는 진짜 팀장처럼 보였다.

“내가 그동안 오해했나?” 싶었다.


그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익숙한 사람, 내 두 번째 팀장이.


그리고 들리는 소문.

"성 과장 말이야,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잘렸대."

"팀원 하고 사이 안 좋았잖아. 소장님 눈 밖에 났대."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자진 퇴사? 아니었다. 그는 정리 대상자였다.


그날 회의실에서

“누가 나갈래요?”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에서 분노가 올라왔다.

결국 성 과장, 그 도 심 팀장과 같은 절차를 밟았고,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에필로그: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10층과 9층 사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전선이 있었고,

그 위를 내가 맨발로 걷고 있었다.


구 과장도, 성 팀장도,

어쩌면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전선 위에서 가장 아슬아슬했던 건 나였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내가 누구 편이어야 하지?”

그 질문의 답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가 내 편인지는.


(다음 편 : 이상한 동료애)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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