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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May 15. 2022

<水녀 -1> 퐁당 빠질 용기


나이가 들면 남들 앞에서 신체를 공개하는 일이 너무 부끄럽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말만 하면 “아무도 너한테 관심 없거든” 이렇게 얄미운 반응만 보여서 나의 부끄러움에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저렇게 시니컬한 척 대답하는 사람 열에 아홉은 매일 소심한 본인과 투쟁하는 것 다 안다. 오늘 아침 무슨 옷을 입을까, 어떤 옷이 제일 날씬해 보일까, 버스 벨을 지금 누를까 정류장 직전에 누를까, 지금 버스 뒷문에 설까, 좀 있다 일어날까 고민할 거면서.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30대로 접어들고 나의 신체를 보일 일이 많지 않다. 드문 경우 중 하나가 수영장이다. 여기서 신기한 점이 있다. 쭉쭉 빵빵 팔방미인 언니들이 가득한 유럽 해변에서도 비키니를 잘만 입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배 나온 아저씨들과 수중 걷기 하러 오는 아줌마들이 대부분인 동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왜 이리 어색한지. 추측건대, 이 부끄러움은 아마 학습된 부끄러움 같다. 동네 수영장에서는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위축돼야 한다는, 그들에게는 무조건 고개를 숙이라는 미디어의 주입식 교육 때문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찾아오는 부끄러움도 키판만 잡으면 금세 사라진다. 너무 힘들어서다. 당장 숨쉬기도 바빠서 부끄러움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일단 팔을 쭉 뻗어서 키판을 앞으로 향하고 고개를 물속에 박으면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아, 아니다. 이 생각 하나는 확실히 든다. “나는 왜 내 돈 주고 물속에서 개고생이지?” 수영 초보들은 알겠지만 물속에서 숨을 참았다가 잠깐 고개를 들고 숨을 쉴 때 엄청난 고뇌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다시 고개를 넣으면 토할 것 같은데, 이 무거운 머리를 다시 넣을까 아니면 물속에 겨우 떠 있는 두 다리를 내리고 좀 쉴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 저 뒤쪽에서 (사실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해서 실질적인 거리로는 출발선 코앞에서) 무뚝뚝한 수영 강사의 외침 소리가 들린다. “중간에 멈추면 실력 안 늘어요!”

‘아, 집에 가고 싶다’ 이 고민을 한 30번 하면 50분의 강습이 끝난다. 사실 수영 강습이란 것이 참 묘한 게, 너무 힘들어도 힘들다는 이유로 집에 갈 수가 없다. 물론 수업 중간에 “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집에 갈래요” 하고 30명 수강생의 시선을 받으면서 수영장 긴 레일을 걸어 탈의실까지 가면 된다. 장담컨대 이 시선을 견디는 일이 수영 50분보다 힘들어서 오늘도 수강생들은 꾸역꾸역 강습을 마치는 것일 것이다. 강습이 끝난 뒤 다 같이 우르르 탈의실로 들어갈 때, 그 무리에 껴서 샤워장으로 들어갈 때 이들은 가장 큰 안도감을 느낀다. 왜냐면 나 포함 여기 있는 모두는 수영복 입은 나를 누가 가만히, 집중해서, 뚫어지게, 강렬하게 쳐다보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왜 수영을 배우느냐. 잘하고 싶으니까. 잘하면 멋있으니까. 사실 이렇게 시작했다가 중간에 포기한 운동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만큼 버린 돈도 많은데 할 말은 많다. 나는 평일에는 열심히 돈 벌어야 하고, 밤에는 회식도 가야 하고, 주말에는 이불 속에서 일주일의 피로를 풀어야 하고, 겨우 이불 밖으로 나오면 아주 좁은 인간관계를 근근이 이어가야 하니까 뛰어난 능력이 없어 뵈는 운동에 꾸준히 투자할 시간이 없다. 그러다가 또 배워보고 싶은 운동이 생겼는데 그게 수영이었다. 물속에서 인어처럼, 고래처럼 온몸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수영을 시작하면서 수영복, 수경, 수모, 가방, 스포츠 타월 이것저것 예쁜 걸로 다 샀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로 쇼핑을 과하게 했더니 또 엄마 등짝 스매싱이 날라 온다. 금방 그만둘 건데 왜 돈 쓰냐고 뭐라 한다. 엄마는 모른다. 이 나이에 연두색 수영복 입고 동네 수영장에 퐁당 빠지는 게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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