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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May 24. 2022

<水녀 -2> 폼생폼사


요새 가장 뿌듯할 때는 저녁 9시다. 퇴근 후 8시 수영 강습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다. 수영장에서 우리 집까지 오려면 시장 하나를 지나쳐야 하는데 이 시장에는 온갖 맛집들이 즐비하다. 이른바 ‘힙’한 맛집이 아니라 진짜 허름한 포차와 고깃집들이 늘어져 있다. 한국인이 공통으로 갖는 편견이 있다면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쓰러질 듯한 노포에서 운영하는 곳은 무조건 맛집’이라는 것.

실제로 이 시장에서 인기 있는 순댓국밥집, 육전집, 삼합집, 분식집, 설렁탕집은 거리두기가 실시되기 전이나 후나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맛집은 천재지변도 피해 가기 마련. 게다가 메뉴만 나열해도 딱 필이 오지 않는가. 술안주로 제격인 메뉴들만 판매하는 곳이라 냄새만으로도 행인들을 취하게 만든다.

수영 강습을 끝내면 아무리 저녁을 많이 먹은 날도 허기가 진다. 펠프스처럼 온몸을 꿀렁꿀렁 움직이며 물속을 헤쳐나간 것은 아니지만, ‘퐁퐁’ 물보라만 화려한 발차기로 100m 정도 왔다 갔다 한 게 전부지만, 왜 배가 고픈지는 나도 모른다. 여튼 이렇게 허기진 상태로 이 시장을 지나려면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다.

왜 괴롭냐 하면, 지글지글 기름에 부쳐지는 육전의 냄새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몇 가지 고민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일단 냄새에 이끌려 노포에 털썩 앉기에 아직 나는 ‘혼밥’ 장인이 아니고, 둘째는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힘들게 첨벙첨벙 발차기한 뒤 나트륨 가득한 순댓국밥 뚝배기에 소주 한 병 쓱싹 하는 일은 왠지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합리화다.

모두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깔깔거리는 그 사이를 걸어올 때 혼자 ‘월클’ 표정을 짓는다. 물론 월클이라는 표현은 나의 시각에서 본, 철저히 주관적인 표현임을 미리 말해둔다. ‘나는 자기 관리의 끝판왕 여자다. 나는 올해 여름 완벽한 인어가 된다. 나는 오후 9시 소주잔을 기울이며 술배를 기르는 대신 우아한 팔동작으로 물살을 가로지르는 고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독서를 한 뒤 지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잠이 들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괜히 수영 가방을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돌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누구라도 방금 내가 수영하고 나온 걸 좀 봐줘! 뭐 이런 거다. 그러면 그 순간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실상은 그 시간에 뭐 딱히 저녁 약속이 없었던 것뿐. 우연히 수영이란 취미를 시작한 것일 뿐. 그래도 마르지 않은 축축한 머리를 휘날리며 솔솔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집으로 오는 길은, 요새 내게 소소한 재미이자 행복이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자기합리화가 나의 뇌를 지배해버렸는지, 저녁 약속이 생기려고 하면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오후 8시 수영 강습이 끝난 뒤 오후 9시 구수한 돼지 수육 냄새를 맡으면서 월클 표정으로 시장을 가로지르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진다. 하루라도 수영을 빼 먹으면 후퇴할 실력이 없음에도 그나마 배운 것마저 모두 까먹을 것 같다. 건강하고 뿌듯했던 내 삶이 무너진 것 같은 미친(?)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는 나에게 취해버린 것일까.

이런 나를 보고 치킨 목뼈를 뜯던 친구는 “네가 너를 가스라이팅 한 엽기적인 경우”라고 진단했다. 얼핏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과잉 자기합리화가 만든 부작용이랄까. 그런데 지금은 이 부작용을 즐기려고 한다. 친구들과 정신을 놓고 먹는 술자리도 너무 즐겁지만 지금 수영장 전신 거울 앞에서 수영복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젖은 머리를 뒤로 ‘촥’ 넘기는 내 모습이 맘에 든다. 오늘도 킥판을 놓쳐 물 꽤나 많이 먹은 사실은 나만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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