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글자를 깨칠 때부터 배우는 만고불변 진리가 있다. 얼추 30년 가까이 살아보니 맞는 말인가 싶은데, 최근 수영을 배우면서 더욱 체감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긴 한데, 나이가 없다기보다는 ‘어려진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배움 앞에서는 모두가 ‘아이’가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새로운 걸 배울 때 모두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 선생님이 곧 ‘신’이 된다. 선생님이 무언가를 “~하세요” 하면 맹목적으로 열심히 따른다. 수영장에서 강사가 “고개 넣으세요” 하면 정말 신기하게 30명이 동시에 물속에 얼굴을 넣는다. 모두의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맞아서 ‘첨벙’ 소리가 아주 경쾌하다.
한 명이 지시를 내릴 때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니 딱히 없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 같은데, 군대는 국가의 부름이라는 공적인 명령이 있는 곳이지만 수영장은 내가 내 돈을 내고 오는 곳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른 장소다. 가장 큰 차이점은 자발성이다. 그래서 수영장이 더욱 특이하게 다가온다. 이곳에만 오면 모든 걸 내려놓고 ‘네’ 대답과 동시에 지시에 맞게 행동으로 옮기는데, 내가 이렇게 행동파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매 순간 놀란다.
30대가 되고선 남들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기가 괜히 싫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봤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내가 판단한다는 치기 어린 자존심인데, 이 얄팍한 자존심이 때론 내 삶의 가치관이 되기도 하고 행동거지의 기준이 되기도 해서 쉽사리 무시할 그런 존재는 아니다. 또 이 자존심이 내 자부심이기도 하다. 각자 자존심을 내세우는 분야, 자존심의 강도, 그 종류가 각기 다를 테지만 자기만의 이유로 이런 ‘부심’을 부리는 경우의 빈도는 나이에 비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런 자존심이 수영장에서는 마비된다. 분명히 나는 오늘 자유형에서 평영으로 넘어가야 할 단계인데, 누가 봐도 나의 발차기와 팔 돌리기는 초급의 것이 아닌데 강사는 오늘도 나를 키판 지옥에서 꺼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키판을 들이미는 강사가 너무 얄미운데, 나는 이제 키판을 졸업할 레베르라고 따지고 싶은데, 나는 또 강사의 호루라기에 칼같이 몸을 띄운다.
속으로 요런 저런 불만, 쏟아지는 질문들을 꿀꺽 삼키고 꾸역꾸역 키판 연습을 하다 보면 새삼 느낀다. ‘진짜 내 발차기가 형편없구나’ ‘이 발차기로는 10m 가는 것도 기적이다’ 하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또 괜히 강사가 미워진다. 잘한다고 착각하고 물속을 마구 헤집어 다니는 시간을 1초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억울하다. 왜 이렇게 강사들은 수강생에게 본인의 객관적인 실력, 객관적인 자세, 객관적인 위치를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려고 할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사회에서는 상사의 부당한 평가에 ‘그건 아닙니다!’라는 반발을 온갖 손짓, 발짓으로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면서 말이다.
최근에 그 이유를 찾았다. 짝사랑 같아서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그가 하는 말이 곧 법이다. 그 남자가 ‘너는 통통한 편이야. 마르면 예쁠 텐데’ 하는 순간 헬스장 1년 회원권을 등록하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된다. 인바디는 나를 저체중이라고 말하고, 회사는 나에게 헬스장에 갈 수 없는 야근을 선사하지만 그런 상황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짝사랑 상대가 ‘해삼, 멍게 잘 먹는 여자가 매력적이지’ 하는 순간 눈 딱 감고 삼킨다. 물컹한 느낌을 즐긴다. 조개, 새우, 미역 다 먹으면서 해삼과 멍게를 못 먹을 게 뭐냐는 난데없는 ‘쿨’병까지 생겨난다.
오늘도 강사의 지시에 맞춰 나의 모든 몸짓을 통제했다. 물속에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나오라면 나오고, 25m 찍고 오라면 찍고 오고. 내가 짝사랑하는 수영장과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럼에도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한 듯하다. 이 긴 글을 쓰며 ‘나는 왜 강사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는가’에 대한 무의미한 고찰을 하는 30대의 나와 달리, 5살 아이들은 내일의 수영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이미 꿈나라로 들어갔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