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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Jul 06. 2022

<水녀 -5> 나이가 중요하지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글자를 깨칠 때부터 배우는 만고불변 진리가 있다. 얼추 30년 가까이 살아보니 맞는 말인가 싶은데, 최근 수영을 배우면서 더욱 체감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긴 한데, 나이가 없다기보다는 ‘어려진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배움 앞에서는 모두가 ‘아이’가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새로운 걸 배울 때 모두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 선생님이 곧 ‘신’이 된다. 선생님이 무언가를 “~하세요” 하면 맹목적으로 열심히 따른다. 수영장에서 강사가 “고개 넣으세요” 하면 정말 신기하게 30명이 동시에 물속에 얼굴을 넣는다. 모두의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맞아서 ‘첨벙’ 소리가 아주 경쾌하다.

한 명이 지시를 내릴 때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니 딱히 없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 같은데, 군대는 국가의 부름이라는 공적인 명령이 있는 곳이지만 수영장은 내가 내 돈을 내고 오는 곳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른 장소다. 가장 큰 차이점은 자발성이다. 그래서 수영장이 더욱 특이하게 다가온다. 이곳에만 오면 모든 걸 내려놓고 ‘네’ 대답과 동시에 지시에 맞게 행동으로 옮기는데, 내가 이렇게 행동파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매 순간 놀란다.

30대가 되고선 남들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기가 괜히 싫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봤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내가 판단한다는 치기 어린 자존심인데, 이 얄팍한 자존심이 때론 내 삶의 가치관이 되기도 하고 행동거지의 기준이 되기도 해서 쉽사리 무시할 그런 존재는 아니다. 또 이 자존심이 내 자부심이기도 하다. 각자 자존심을 내세우는 분야, 자존심의 강도, 그 종류가 각기 다를 테지만 자기만의 이유로 이런 ‘부심’을 부리는 경우의 빈도는 나이에 비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런 자존심이 수영장에서는 마비된다. 분명히 나는 오늘 자유형에서 평영으로 넘어가야 할 단계인데, 누가 봐도 나의 발차기와 팔 돌리기는 초급의 것이 아닌데 강사는 오늘도 나를 키판 지옥에서 꺼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키판을 들이미는 강사가 너무 얄미운데, 나는 이제 키판을 졸업할 레베르라고 따지고 싶은데, 나는 또 강사의 호루라기에 칼같이 몸을 띄운다.

속으로 요런 저런 불만, 쏟아지는 질문들을 꿀꺽 삼키고 꾸역꾸역 키판 연습을 하다 보면 새삼 느낀다. ‘진짜 내 발차기가 형편없구나’ ‘이 발차기로는 10m 가는 것도 기적이다’ 하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또 괜히 강사가 미워진다. 잘한다고 착각하고 물속을 마구 헤집어 다니는 시간을 1초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억울하다. 왜 이렇게 강사들은 수강생에게 본인의 객관적인 실력, 객관적인 자세, 객관적인 위치를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려고 할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사회에서는 상사의 부당한 평가에 ‘그건 아닙니다!’라는 반발을 온갖 손짓, 발짓으로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면서 말이다.

최근에 그 이유를 찾았다. 짝사랑 같아서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그가 하는 말이 곧 법이다. 그 남자가 ‘너는 통통한 편이야. 마르면 예쁠 텐데’ 하는 순간 헬스장 1년 회원권을 등록하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된다. 인바디는 나를 저체중이라고 말하고, 회사는 나에게 헬스장에 갈 수 없는 야근을 선사하지만 그런 상황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짝사랑 상대가 ‘해삼, 멍게 잘 먹는 여자가 매력적이지’ 하는 순간 눈 딱 감고 삼킨다. 물컹한 느낌을 즐긴다. 조개, 새우, 미역 다 먹으면서 해삼과 멍게를 못 먹을 게 뭐냐는 난데없는 ‘쿨’병까지 생겨난다.

오늘도 강사의 지시에 맞춰 나의 모든 몸짓을 통제했다. 물속에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나오라면 나오고, 25m 찍고 오라면 찍고 오고. 내가 짝사랑하는 수영장과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럼에도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한 듯하다. 이 긴 글을 쓰며 ‘나는 왜 강사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는가’에 대한 무의미한 고찰을 하는 30대의 나와 달리, 5살 아이들은 내일의 수영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이미 꿈나라로 들어갔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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