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므소 Jul 07. 2022

<水녀 -6> 일회성 만남

요즘 내가 가진 가장 나쁜 버릇을 꼽으라면, 사람들을 ‘일회성’ 취급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취급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우’를 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례하게 행동할 경우, 상대방 입장에선 평균일지라도 내 기준에서는 평균 이하의 언행일 경우 바로 일회성 대우가 장전된다.

이게 뭐냐 하면, ‘어차피 한번 보고 안 볼 사이인데’라며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말한다. 20대 초반 같았으면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상대의 행동에 따박따박 따지면서, 언성을 높여가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을 테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지금은 그런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비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는 초연한 상태의 나이가 됐다.

이런 나의 일회성 대우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일단 장점. 상대방이 더 이상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일회성 대우의 특징은 나의 눈빛에 초점이 흐려지고, 말과 행동에 영혼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예스맨이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안 볼 사이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에 ‘네, 그렇네요’ ‘네, 맞아요’ ‘네, 그러게요’ ‘네, 저도요’ 등 다양하게 응용이 가능한 ‘네’ 시리즈의 대답 폭격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나기 0.23초를 남겨두고 재빠르게 ‘네’ 공격을 날려야 하는데, 그래야만 상대방의 기분을 아주 미묘하게 상하게 만들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방도 나의 이런 급격한 변화를 눈치채고 ‘얘가 내말 흘려듣네. 내가 뭔 지X을 해도 한쪽 귀로 흘리겠네’라며 포기를 한다. 그러고선 곧 내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단점은, 일부가 나를 호구로 볼 가능성이 크다. 내 안에 어떤 폭력성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쏘아대는 ‘네’ 폭격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일회성 대우는 ‘너 다시는 안 볼 거야. 그래서 이렇게 대꾸하는 거니까 조용히 가줄래?’를 돌려 말하는 주문이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는 ‘나 조금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봐서 당신의 말에 대꾸도 못 하는 루저에요’로 착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착각은 내 인내심을 바닥으로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가끔 등장해 내 속을 다 뒤집어 놓는다. 아마 10년쯤 지나면 일회성 대우에서 한 단계 진화한, 이들마저 물리칠 수 있는 또 다른 주문을 발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결론을 내면, 일회성 대우가 필요 없는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다. 이들한테는 ‘이번에만 보고 안 볼 거니까 그냥 웃고 넘어갈게’가 적용되지 않는다. 평생 볼 사람들이라 웃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온갖 화와 짜증을 다 내는 것이다. 50년 더 볼 예정인데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이 갈등, 분노의 발화 지점을 바로 잡지 않으면 큰일 나니까, 이런 맥락에서 모든 감정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친한 직장 동기에게, 동기보다 친구에게, 친구보다 가족한테 더 감정 제어가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엄마한테 화내는 것은 세대 불문, 나이 불문, 성별 불문 ‘국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오늘은 평영 개구리 발차기를 하는데, 남들은 2주 만에 되는 것이 나만 2달째 되지 않아 혼자 온갖 짜증을 다 부렸다. 내 입장에서는 온갖 짜증인데 남들이 볼 때는 손바닥으로 수영장 물 표면을 몇 번 내리친 것이 전부이긴 하다. 그래도 우리 강사님은 짬이 남다르다. 나의 소심한 신경질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말하는 거다. 수영 오늘 하루하고 그만둘 거 아니지 않냐고. 오늘 하루만 하는 거면 화가 안 날 텐데 평생 하고 싶은 수영이라고 생각하니까 욕심이 나고 짜증도 나는 거라고. 그 말을 들으니까 맞는 말 같다.

전셋집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평생 살아야 할 내 집 어딘가가 마음에 안 드는 것보다 짜증이 날까. 6월 어느 날 방문한 캐리비안 베이가 아무리 불만족스러워도 1년 등록한 동네 수영장이 맘에 안 드는 것보다 화가 날까. 평생 볼 사람, 평생 할 놀이, 평생 할 것들. 계속할 예정이니까 화도 나고 짜증이 나겠지. 그래, 수영. 너는 특별히 일회성 만남에서 빼줄란다. 어디 한번 평생 싸워보자.

이전 18화 <水녀 -7> 적의 심장을 쏴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