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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Jul 05. 2022

<山녀 -4 > 아차산 크리스마스


2014년 12월 독일 친구 하나가 갑자기 한국에 왔다.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날이다. 칼은 새해를 맞고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는데, 연말연초 꽤 긴 여행길에 오른 것 치고 계획이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나와 크리스마스부터 뉴이어이브까지 보낼 생각이었다. 나는 당시 상황상 그럴 수 없었다. 내 계획을 고려 않고 무턱대고 긴 일정을 함께해달라는 친구에게 약간 짜증이 나버리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태원 한복판에 숙소를 잡은 친구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25일 밤 그는 “아침에 갈만한 좋은 산이 있으면 거기에 가자”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리는 아차산역 1번 출구에서 만났다. 정말 활달하고 말이 끊이지 않던 친구의 표정이 이날은 어두웠다. 인사만 나누곤 그는 아차산 정상석까지 가는 동안 말 한마디도 없었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아침부터 산 가자고 해서 왔더니 말도 없네’ 생각하며 헉헉 대면서 그 황새 걸음을 좇았다.

정상 한적한 곳에 앉아 숨 고르던 칼은 두툼한 편지를 꺼내줬다. “새해까지 있다가 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내일로 비행기를 당겼어. 편지는 내가 비행기를 타면 읽어” 본인이 너무 계획 없이 와서 의존해 날 힘들게 한 것 같단 말도 덧붙였다. 유럽사람이 가족과 함께 하는 연말연초 홀리데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상기했고 난 미안해졌다. 집 가면서 읽은 편지엔 가족과의 휴일을 포기할 만큼의 어떤 마음에 대한 긴 설명과 나의 안녕을 바라는 기원이 담겨있었다.

다음날 공항에서 칼을 보내고 생각했다. 아니 요즘도 아차산에 가거나 그 산이 떠오르면 생각해본다. 왜 칼은 그날 산에 가자고 했을까. 그의 숙소는 이태원 한복판. 나와 갔던 곳은 종로, 강남, 한남동 같은 곳. 늘 시끄럽고, 여기로 오게끔 본인을 추동한 나 없이는 더 낯설고 외롭고, 심지어 나와 있어도 설명과 이해가 요구되는 곳들이었다. 이런 곳에선 꾹꾹 눌러 쓴 편지를 줄 수도, 마음 이야기를 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이어야 했을 것이다. 서운하고 화나고 미워서 뭐라고 퍼붓고 싶지만 그 말들을 할 수 없게 제 에너지를 고갈시켜줄 곳이라서. 얼어버린 겨울의 흙이며, 그럼에도 초록색을 잃지 않는 나무들, 자갈부터 너른 바위, 신발 끝에 묻은 눈, 시린 코끝, 맑은 아침 공기가 만드는 콧물 같은 건 독일에도 있을테니 외딴 나라에 있다는 느낌도 덜했을까. 8년이나 지났으니 괜히 미안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이제 아차산에 갈 때면 칼이 용기와 결단력 있는 멋쟁이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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