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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Jul 06. 2022

<山녀 -5> 무욕적인 등산

높은 곳을 선호한다. 버스에 앉을 땐 맨 뒷자리 혹은 바퀴 때문에 튀어 올라온 자리에 앉는다. 카페나 식당에서도 높이 솟은 아일랜드 식탁의 바 체어에 앉는 게 좋다. 나머지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 엉덩이 지점에 앉는 게 싫기도 하다. 산에 오를 때도 은근히 비슷한 욕구를 발견한다.

한라산을 10시간 정도에 걸쳐 오르면서 정말 고통스러웠다. 실컷 올랐더니 갑자기 미친 듯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나오고, 또 내려갔더니 끝도 안 보이는 오르막길이 나왔다. 정신까지 혼미해져서 포기하기 일보직전 이었지만 기를 쓰고 올랐다. 백록담도 백록담이고, 남한에서 제일 높다는 꼭대기에서 섬 덩어리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어 올라볼까 하는 상승욕의 발로다.

욕구는 꿈을 품게 했다. 안나푸르나 ABC 트레킹을 하는 것. 해발 4130미터라는 압도적인 고도를 고려하면 솔직히 이번 생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으니, 꿈은 크고 높게 가지는 거였다. 일단 품었다. 엄청난 기개를 뿜는 겹겹의 봉우리와 만년설을 밟고 서서 ‘세상에 못 할 건 없다’ 따위를 외치고 싶은 걸까?  요즘엔 쓰지 않는 말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정을 ‘정복’이라고 했다. 목숨을 담보로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발 디디려는 사람들에겐 그런 욕망이 자리했던 것이다. 내 안에도 비스무리한 욕망이 있었을지도.

이런 나와는 반대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봤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티베트인들인데, 이 사람들은 중국 윈난성에서 티베트~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도 4000미터의 산맥 차마고도를 ‘삼보일배’ 하면서 걸었다. 폐타이어로 만든 앞치마에 무릎 보호대, 두꺼운 나무 판자로 만든 손 깔개를 하고 네뎃 달을 그렇게 걷는다. 깎아 내지르는 협곡이며 밀키스색의 빙하 녹은 물이며 입 떡 벌어지는 광경은 볼 새도 없어 보였다. 이 고행을 사서 하던 사람 중 한 명은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내가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개미 하나 죽이지 않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기를 빈다”고 말했다. 이런 무욕적인 사람이 실존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한라산 정상에 도착해서 내가 한 생각은 ‘헬기 타고 내려가고 싶다’였다. 간신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운 좋게 걷힌 구름 아래로 백록담과 제주도를 보고 있자니 ‘높아서 좋다’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이 해발 2000미터에서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두 폴대와 무릎이 살아 남아서 나를 이 상승욕구로부터 연착륙 시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산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물과 초콜릿을 덜 챙긴 나를 미워했다. 온갖 벌레가 날 죽이지 않길 바랐고 오로지 밥 한 술만 먹길 바라는 작은 바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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