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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Aug 12. 2024

6. 현수의 여사친, 하설희





#1     


딩동! 딩동!     



          

어린 시절의 상념에 젖어졌던 현수는 초인종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인터폰 앞으로 현수가 어슬렁거리며 갔다. 인터폰 화면에는 무알코올 맥주 다발만 보이고 사람은 안 보였다.               




‘하설희, 또 한잔 생각나서 왔나 보네!

(쓴웃음을 지으며) 잘됐네. 

혼자 있어 봐야 엽서 생각뿐일 텐데...’         



      

현수는 핸드폰을 들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또 한 번 바깥채까지 뛰어나갔다.

오늘은 운명이 현수를 달리게 만드는 날이다.    



           

“자! 받아!”       



        

6캔들이 무알코올 맥주와 그냥 맥주 여러 다발이 현수의 시야를 가렸다. 

하설희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현수에게 맥주를 안기며 그녀는 제 집인 양 안채로 향했다.          



     

“야, 하설희! 같이 가.”        




            

#2     


하설희도 ‘판무자’의 멤버이다.

대학생 때 신춘문예에 등단하며 화려하게 작가로 데뷔했지만? 


첫발이 *끝발이라는 말처럼,

그 이후로 계속해서 줄줄이 망작만 쓰다가 절필을 선언하고 대기업 비서실에 들어갔다.  



             

“현수야!

나 방자훈 때문에 죽겠어. 정말!!




설희는 안채에 들어오자마자 가방도 내팽개치고 소리를 질렀다.

익숙한 듯 현수는 설희가 내팽개친 가방을 챙기고 가방에서 튕겨 나온 핸드폰도 주워놓았다.  



             

설희: 나 그 자식 때문에 나 진짜 죽겠어...

방자훈 그 자식!     


현수: 자훈이가 왜 또~         



      

누가 들으면 자훈이가 설희랑 사귀다가 트로트 가수로 뜨고 나서 버린 줄 알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자훈이와 설희는 사귄 적이... 현수가 알기로는 없다.      


하설희는 제풀에 지쳐서 민현수네 안채에서 대자로 뻗어 누웠다.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혼잣말을 계속했다.

입고 온 스커트가 살짝 뒤집힌 걸 보고 현수는 눈을 돌렸다.      



    

현수: 야, 너 스커트...     


설희: 아... 넌 또 뭘 새삼스레.

(스커트를 바로 하며) 우리 방~자.훈.이.는 뜬 것 말고는 잘못이 없지.

없지...

뜨고 나서도 똑같지.

걔가 또 연예인병 포비아(공포증)가 있잖아. 

그런데, 우리 회장... 

이 할배가 연말에 자기 팔순 잔치에 나보고 방자훈이를 데려오라는 거야!.

너 같으면 오겠냐? 연말이 노다진데? 

    

현수: (맥주를 냉장고와 냉동고에 나눠 넣으며) 그렇지~ 

그런데 너희 회장님 은퇴 안 하셨어? 

그 첫째 아들인가... 그 사람이 사장이라며?     



          

‘에휴’하며 설희는 몸을 일으켰다. 

소파 다리 부분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현수는 그 옆에 서서 설희를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설희: 현수야 ~ 

우리 회장님 구순까진 너끈하실 것 같아.

사장님이 곧 환갑인데, 최종결정은 아직도 회장님이 OK 해야 해. 

어이가 없다니깐?

내가 연말은 안된다고 회장님한테 몇 번을 기안해서 올렸는지 몰라.

근데도! 데려오래.

그 자리에서 나만 혼나고 사장님은 입 꾹 다물고 있어.

내가 총알받이냐고!!!     


현수: 어~ 어.          




현수는 대답을 하며 하설희의 막무가내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습관처럼 대꾸했다.   



             

설희: 야, 너 대답이 영혼이 없다?

    

현수: 안주 필요하지 않아? 

떡볶이 어때?     


설희: 음... (못 이기는 척) 마라 로제로 해주면 먹고?    

 

현수: 하.설.희. 

무당집 딸 맞네? 

안 그래도 좀 전에 마라 로제 떡볶이 레시피를 찾고 있었는데!   

  

설희: 역시~

내가 직장복은 없어도 먹을 복이랑 친구 복은 있다니깐?           




         

#3     


현수는 부엌으로 자리를 옮겨 물 한 잔을 떠서 컵 받침과 함께 설희 앞에 놓아둔다.

현수의 손등에 금방 꼬집듯이 할퀸 듯하게 상처해 설희에 시선이 잠시 머문다.         



       

현수: 이거 마시고 술 좀 깨고 있어.

네 맥주랑 무알코올 맥주랑 냉동 칸에서 슬러시화 되고 있고~

마라 로제 떡볶이 금방 하니깐.

     

설희: 역시 민현수!

조신하고 곱고 하여튼 이러니깐 다들 널 사위 삼고 싶어 하지.

나중에 정 없으면? 

알지? 이 누님한테 장가와라.     




대꾸할 가지도 없다는 듯이 비식 웃으며 현수는 다시 부엌으로 갔다. 습관적으로 핸드폰 배터리를 체크하고 요리하기 시작했다.    



           

현수: 어디 보자~ 

마라 로제 떡볶이 야매 레시피가~              



 

일부러 크게 떠들며 현수는 설희네 아버지, 하씨 아저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저씨. ^^ 현수에요.

제주도 좋으시죠?     

설희 불러서 마라 로제 떡볶이 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편하게 콘서트 보시고요.

저희 할머니도 늘 잘 챙겨주시지만 ^^     

우리 홍판덕 여사님, 한 번 더 잘 부탁드립니다.’             



  

현수는 판산동 사람들에게 늘 다정한 아이였다. 

이 다정함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판산동에서 몸으로 체득한 것이었다.      




               

#4     


만약 현수가 혼자일 때 귀신 보는 게 무서워서 친구를 많이 사귀려 않았더라면?

지금 외톨이였을 거다.      


무당이 될 신기는 없는데 귀신은 보이고 그래서 놀라서 툭하면 기절하는 아이라니... 

솔직히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도 현수는 잘 생겼지만, 

어릴 땐 표정이 무척 어두워서 다가가기 힘든 아이였다.



민현수는 솔직히 운이 좋아서 착한 어린 귀신을 본 것도 있다. 

주변에 자훈이나 설희 같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있을 때 귀신을 보고 듣는데 현수는 늘 영이 맑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몰려다니니 나쁜 기운이 낄 틈이 없었다.     


현수는 제자리를 만들 줄 아는 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판산동이 무당촌이라 귀신과 밀접해도 홍판덕 여사가 있어도 귀신 보는 손 많이 가는 아이가 이쁠 리 없다.      


현수는 할머니인 홍여사와 도우미 이모들 같은 어른들이 사이에서 크다 보니 어른들이 이뻐하는 행동과 배려가 뭔지 아는 아이였다.      


현수는 아이들과 집집마다 몰려다니며 숙제할 때면, 

같은 또래지만 모르는 걸 곧잘 가르쳐주었다.     

친구네에서 저녁밥을 얻어먹을 때면, 

상 차리는 것부터 나서서 도우니 어찌 이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누군가는 현수가 어른스러워서 그게 더 안쓰럽다고 했지만, 그런 말은 하는 이들이 현수를 더 챙겼다. 아이다워지라고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판산동 무당촌의 끈끈함은 현수가 동네 아이들과 친구를 하러 들면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도 최고 무당 홍판덕 여사의 신이 말한 것이 맞았다.

영호구 판산동은 현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         



      

하설희의 아버지, 하씨 아저씨가 현수에게 전화를 했다.    



           

현수: (작은 목소리로) 네~ 아저씨!     


하씨 아저씨: 수야! 

가스나 그기 또 술 츠먹고 느그 집 가서 뻗어뿟제?

저녁은 개코나. 

가스나 그건 술 츠먹을 때 내 전화 꼭 안 받는데 아까부터 안 받드라!     


현수: 아... 아니에요.     


하씨 아저씨: 내가 마 동네 챙피해서 몬산다 아이가... (한숨을 쉬며)

현수야. 고맙데이.

가스나 그거 너무 받아주지 말고 술 츠믁다가 ㅈㄹ하믄 걍 우리 편의점에 갔다 버려삐라.

그래야 정신 사릴끼다.     


현수: 네~ 

집에 잘 데려다 놓을게요.     


하씨 아저씨: 그래. 수야. 고맙데이.

내사 마 지금은 자훈이 콘서트에 왔지만서도... 

내 맘 속에 사윗감는 니가 1등인거 알제?     


현수: 아효, 아저씨...     


하씨 아저씨: 됐다 마! 

대답 들으려고 한말 아니다. 

드가라!               




하씨 아저씨는 홍여사처럼 고향이 부산이다. 

그리고 원래 판산동에서 알아주는 딸바보였는데... 하설희가 워낙 천방지축이다 보니 요즘은 부녀관계가 좀 소원한 편이다.


현수는 어릴 적에 하씨 아저씨가 하는 슈퍼를 거의 매일 찾아가 놀곤 했다.     

그때부터 다정다감하고 모난 데가 없는 민현수는 판산동의 1등 사윗감이긴 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판산동 1등 무당인 홍판덕 여사 덕분에 현수는 판산동의 금수저나 다름없었다.     


사실 현수는 아직 한 번도 연인을 만든 적이 없다. 

과호흡도 그렇지만 비밀이 많은 현수는 이성과 깊은 관계를 맺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걸 아는 동네 어른들은 적었다.               





#5     


설희: (미안한 듯) 현수야, 도와줄까?     


현수: 어. 설희야, 

음. 노동요나 하나 좋은 거 찾아서 틀어줘~     


설희: 알았어. 장르는?

너희 집에서 음악을 듣는 건 간만이네.     


현수: 스타*스 같은 데 가면 나오는 라운지 음악이면 좋겠다.      


설희: 어? 어. 알았어.

(무심한 듯) 우리 아빠 말은 그냥 흘려들어.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찾으며) 그 아저씨 벌써 노망인 것 같아.     


현수: 들렸어?     


설희: 래퍼도 아니면서 맨날 랩 하듯이 하는 그 레퍼토리, 내가 모르겠냐?

하루 이틀이어야지.

내 앞에서는 19금도 해 그 아저씨~ 너를 확 자빠뜨리라는 둥! 어쩌라는 둥!

하여튼 주책이야! 

‘(혼잣말로) 자빠뜨리는 건 뭐 혼자 되는 줄 아는 건지...’   

  

현수: (얼굴이 새빨게 지며) 어... 

     

설희: (부산스레 손을 놀리며) 아! 찾았다!

(리듬을 타며 고객을 끄덕이다) 이거 노동요용 플레이리스트로 괜찮은데~ 튼다?     


현수: 어~ 고마워~     


설희: 현수야~     


현수: 왜?     


설희: 이제...(손등을 떠올리며) 과호흡 오는 건 괜찮아졌어?    

 

현수: 어? 어... 

이제 괜찮지. 언제쩍 얘기야.     


설희: 응... 그래.             



  

금세 듣기 좋은 음색의 라운지 음악이 민현수네 안채에 포근하게 깔렸다.

설희의 낯빛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이어폰과 헤드폰이 필수인 현대 사회에서 민현수는 오로지 스피커로만 모든 소리를 들었다.     


현수네 거실에는 그 키가 지금 현수의 허리쯤까지 오는 커다란 스피커가 양쪽에 있다.

마치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워두는 것처럼.     

이 스피커는 반 무광의 커다란 나무판이 양 옆면에 있고 앞은 까만 천을 씌워 새까맸다.



그 사이 첫 곡에서 두 번째 곡으로 바뀌면서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운드가 마치 기분 좋은 아침 안개처럼 온 집을 편안하게 감싸 안았다.    



           

현수: 오~ 첫 곡도 좋았는데 두 번째 곡 진짜 좋다~ 

이 플레이리스트 따로 보내줘.   

  

설희: 좋은 건 나눠야지!

‘판무자’ 단톡으로 보내놨어. 

너희 집 이 스피커는 언제 들어도 좋다. 

뭔가 편안해.   

  

현수: 그치? (떡볶이 소스를 저으며) 우리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낙* 상가 가서 몇 시간을 골랐는지 몰라. 

나 영어 듣기 평가할 때 쓴다고 중고지만 제일 좋은 걸로 사주셨지.     


설희: 맞다. 

그때도 이 스피커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었던 것 같았는데.

이 스피커 80~90년대꺼지? 


현수: 어.어. 

스피커는 그때 산 그대로고, 선만 갈았어.

근데 설희 너, 이거 보다 더 좋은 거 있잖아? 월급 모아서 산 거.     


설희: 그 스피커? 

이제야 말하지만, 너 따라 하다가 망한 허세였지. 

월급 몇 달 치를 모아서 질렀는데, 너희 집 것만큼 소리가 편안하지가 않아.

소리가 좋긴 한데... 

(무릎은 세워 모으곤 고개를 파묻고) 소리가 너무 좋아서 오래 들으면... 

몸이 피곤한 기분이 들더라.

(혼잣말로) 누구처럼 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서 불편한...


현수: 어? 뭐라고? 

(떡을 넣으며) 안 들렸어!     


설희: 배고파서 배랑 등이랑 허그 중이라고 했따~     


현수: 어~ 다 되가~       



        

손주 녀석 영어 듣기 평가를 시켜주려고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아닌 스피커를 사는 할머니라니.

누가 들으면 개그냐고 할 만큼 이상한 이야기지만, 하설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낯빛이 어두워지곤 했다.



하설희는 소파에 고개를 젖히고 기대어 천장을 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6     


하설희, 방자훈, 민현수는 4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설희 엄마와 자훈이 엄마가 친분이 있어서 둘은 그 전부터 보던 사이였다. 


자훈이가 아니면 말이 없던 현수는 늘 혼자 있는 아이라 설희의 기억엔 없는 아이와 마찬가지였다.     

더 솔직하게는 하설희 자존심에 일부러 없는 것처럼 여기던 아이가 민현수였다. 


현수는 어릴 적에 뽀얀 얼굴이 여느 여자아이보다 고왔다.     

시커먼 피부의 아빠와 태권도니, 축구니 하며 새까만 자훈이만 보던 설희에게 현수는 신세계였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 봤던 뽀얀 아이 민현수.     

설희의 첫사랑이었다. 

어린 첫사랑은 그렇게 얼굴만으로도 시작된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실수만 연발하는 게 사람이다. 

어린 설희는 그걸 알았는지 현수와 4학년 때 같이 반이 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현수 얼굴을 멀리서 구경만 했다. 

     


그래서

설희네에서 민현수가 죽을 뻔하기 전까지는 이 둘은 지금처럼 깊게 친하진 않았다.


정말 죽을뻔했던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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