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고추
얼마 전 온 식구들이 모여 고추를 심었다. 코로나가 심해진 와중에도 마스크를 쓰고 굳이 모여야 했던건 4월부터는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기에 3월이 채 가기 전에 고추 심기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마스크를 끼고 고추를 심기 위해 할머니댁으로 모였다. 고추를 심을 시기가 정해지고 나면 아빠와 할머니는 고추 모종을 파는 곳에 들러 한 해 고추 농사를 지을 만큼의 모종을 준비하셨고 가족들은 주말 오전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각자 역할을 분담해 고추를 심기 시작한다. 감자와 함께 밭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는 작물이 바로 고추이다. 감자는 호미 하나로 심을 수 있지만 고추는 그 과정이 꽤나 번거로워 온 가족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먼저 밭을 갈고 비닐을 씌우면 모종을 심을 준비가 끝난다. 가족 중 누군가가 호미로 비닐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놋쇠 주전자로 물을 뿌려 땅을 촉촉하게 해주고 그 뒤를 따르는 이가 고추 모종을 구멍 사이에 집어넣고 다시 흙을 덮어준다. 모종을 일정한 간격으로 심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들시들한 고추 모종이 쓰러지지 않게 모종 옆에 지지대를 만들어주는 일도 해주어야 한다. 또 다른 이가 고추 모종마다 말뚝 박는 작업을 하고 나면 그 뒤를 따르는 이가 연약한 고춧대를 부드럽게 끈으로 매어주고 다시 물을 주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 바로 고추를 심는 날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고추는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작물이기도 하지만 반면 키우기 어려운 작물로도 자주 꼽히곤 한다. 재배기간이 다른 작물에 비해 길기도 하거니와 병충해에 약하고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이유에서이다. 온 가족이 모여 열심히 심어둔 고추 모종도 아주심기를 하고 난 후 뿌리가 온전히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까지 적어도 2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할머니와 나는 가족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비가 오지 않는 날씨를 걱정하며 주전자를 들고 몇 번이나 밭을 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땅에 적응하지 못해 시들어버린 녀석들의 자리에는 새로운 모종을 다시 사다 심어주어야 했다. 바람이 지나치게 많이 불던 며칠 동안 할머니는 여전히 연약한 고춧대가 바람에 꺾이진 않을까 걱정하시며 동이 트면 제일 먼저 밭으로 나가 고추를 살피곤 하셨다. 마트에서는 천 원으로 쉽게 살 수 있는 고추였지만 할머니가 얼마나 애지중지 고추를 키우셨는지를 떠오리면 때론 입 안에 쓴 맛이 돌기도 한다.
한자 이름 풀이를 보면 먹으면 매워서 괴롭다고 괴로울 ‘고’를 써서 ‘고초’라고 부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고추’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추가 들어온 유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식재료로 쓰이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하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고추는 전 세계적으로 식탁에 오를 만큼 친숙한 식재료인데 따뜻하고 더운 나라에서는 다년생 식물로 재배되지만 겨울이 추운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살이 식물이다. 늦 봄에 심어 6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수확하는데 약을 뿌려도 사라지지 않는 잡초의 제초 작업뿐만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수확해야 하고 세척 후 볕 좋은 마당이나 지붕에서 건조까지 시켜야 하니 그야말로 손이 많이 가는 농작물이 아닐 수 없다.
마당에서 가족들이 함께 모여 고기를 구워 먹을 때도 고추는 감초 같은 역할을 하지만 고추가 제일 빛을 바랄 때는 아무래도 김장철이 아닐까. 할머니가 곱게 빻아두신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담근 김장 김치는 언제, 어떤 음식과 먹어도 찰떡궁합이라 나에게는 김장하는 날을 유난히 기다렸던 어린 시절 기억이 있다. 김장을 앞두고 할머니는 늘 바쁘셨다. 배추를 절이는 일뿐만 아니라 김장에 필요한 젓갈 공수와 찹쌀풀을 쑤는것 그리고 고춧가루를 빻아 준비해놓는 일까지 여든이 넘도록 그것들은 할머니의 기쁨이자 자식들을 위해 응당 하셔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매운 걸 좋아하는 남편과 나의 식성은 꽤나 닮아 있어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청양고추가 떨어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순두부찌개를 끓일 때도, 김치찌개를 끓일 때에도, 오일 파스타를 할 때도 늘 빠지지 않았던 고추. 사는 일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면 청양고추 두 개를 냉장고에서 꺼내 어석어석 도마에 가지런히 썰어내어 뜨겁게 끓는 국물 속에 무심하게 던져 넣곤 했는데 고추의 매운맛을 즐기는 동안이라도 잠시나마 서울살이에 대한 고단함을 잊고 싶은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입 안 가득 알싸하게 퍼지는 매운맛과 함께 소주 두 어잔을 기울이고 나면 거짓말처럼 내일을 살아갈 용기가 생겨서 우리는 늘 고추를 식탁 위에 두고 살았다.
글을 쓰러 나가는 길이면 늘 마주하는 고추밭. 매일 별다를 것 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인 것만 같은데 고추는 내가 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자라나는 모양이다. 햇살이 유난히 잘 드는 할머니 밭에서 주렁주렁 자라나는 고추를 보니 마음이 한껏 풍요롭다. 몇 날 며칠 밭을 반듯하게 고르고 비닐을 씌우던 수고로움이 초록을 가득 머금고 자라나는 작물들을 보며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올 여름, 샛별이가 태어날 무렵이면 고추 밭에도 뜨거운 여름을 머금고 우리의 정성이 한가득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