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에서, 느리게 써 내려간 것들
저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장면 앞에서 펜을 꺼냅니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저의 작은 가방 속에는 늘 노트와 연필이 들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머릿속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떠오를 때면 가방 속에서 연필과 노트를 꺼내어 언제나처럼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내려갑니다.
해야 할 일,
책 속에서 만난 문장,
지나가다 들은 누군가의 말.
기록은 특별한 것을 남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지나가 버릴 것들을 잠시 붙잡아 두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연필을 들고 다닙니다.
조금은 느리게 쓰기 위해서입니다.
지우고, 다시 쓰고, 손으로 한 번 더 눌러 적는 그 시간이 생각을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해 줍니다.
연필은 제 취향을 닮아 모두 검은색입니다. 투박하고, 조금은 점잖은 모양의 것들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천천히 글자를 눌러쓰고 있으면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습니다. 기록은 그렇게 지나간 것들을 다시 지금으로 불러옵니다.
그래서 저는 기록을 자주 합니다. 지나간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순간의 저를 나중에 다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베트남에서의 시간은 기록을 조금 더 가까이 두게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눌러쓴 가격표, 커피 얼룩이 번진 메뉴판, 길가에 세워둔 투박한 입간판들.
이곳에는 천천히 쓰인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면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시간이 잠시 머물렀던 흔적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결국 무언가를 남기는 일이 아니라, 머물렀던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