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기다림을 살아내는 법

by Jessie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에게 기다림은 늘 준비된 시간입니다.



대학생 시절, 사람들은 약속에 늦는 일을 가볍게 ‘코리안타임’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일이 늘 더 편했던 이유에서 입니다.


약속이 있는 날이면 조금 일찍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가방 안에는 어김없이 한 권의 책을 넣어두었고 가방을 쓰다듬으며 약속장소로 향하는 일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저를 위한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습관일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고 먼저 움직이던 성격은 세대를 건너오며 긴장 대신 여유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림을 불편하게 느끼기보다 조용히 아껴두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의 생활은 그 감각을 조금 더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하루면 끝날 일들이 이곳에서는 며칠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곤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일도 생각보다 드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느림이 낯설었습니다. 시간이 자꾸 비어버리는 기분, 다음 일정을 계획할 수 없다는 막막함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지나며 저는 점점 빼곡한 계획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을 채우는 방식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가방 속의 책을 꺼내 읽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시간이 기다리는 시간의 여백을 채웁니다.


그렇게 기다림은 점점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여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의 저는 누군가의 늦음을 조금 더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비로 도착이 늦어진 사람의 사정을 상상하고, 서툰 손길로 음식을 내어오는 이의 속도를 기다리면서요.


예전보다 느려진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저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은 여전히 같은 시간을 흐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저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불편함 대신 여유를 꺼내어 들 수 있는 사람. 아마도 그것이 이곳에서 제가 배운 가장 조용한 변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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