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45분.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 체력의 한계를 벗어난 고강도의 노동에 질린 내 몸은 아우성이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얼굴빛은 잿빛으로 핏기는 제로, 지쳐서 구부러지는 허리, 물 마실 틈조차 허락되지 않아 건조해지다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는 힘이 쫘악 빠졌다. 4달간의 요양원 근무로 몸에 붙은 노동을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당장 내가 요양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누워도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
오후 2시 45분.
Handover(오전 근무를 한 책임 간호사가 오후 근무하는 스태프들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시간)로 오후 근무를 시작한 나는 7시간째 노동 중이다. 심장을 쥐여 짜고 피를 쫙쫙 말리는 듯한 강도의 노동이다. 오후엔 8명이 근무인데 3명의 요양보호사가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한 요양보호사들과 간호사들과 약복용을 지원하기 위해 출근한 직원이 이 빈 자리들을 메워야 한다. 부실한 내 육신은 당장 쓰러져서 숨을 헐떡여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다.
10시 퇴근 시간.
학수고대하던 퇴근시간이 15분 남았다. 이 기대가 없다면 건강 약자인 내가 끝까지 버티기 어려운 돌봄 노동의 강도다. 몸이 축날수록 퇴근시간이 가깝다는 기대와 “땡큐!”로 버틴다. “땡큐”, “땡큐” 요양원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들 간에 수시로 날리는 인사다. 한국의 노동요와 추임새 비슷한 기능일까? 격한 육체노동, 극심한 정신적 피로가 일상인 요양원 노동 중에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방식이다.
나도 요양원 4개월 만에 땡큐가 입에 붙었다. 함께 호이스트 기계를 밀고 나서도 땡큐, 함께 어르신의 몸을 좌우로 돌려가며 똥기저귀를 갈고도 땡큐, 본인의 발로 일어설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한 명의 어르신을 두 명이 달라 붙어 화장실 의자에 옮겨 놓고도 땡큐. 입에 땡큐가 늘 장착되어 언제든 방아쇠가 당겨진다. 일이 고되다 보니 곁에서 고된 시간을 함께 버티는 동료들 간에 동료애가 샘솟고 진심으로 땡큐다. 어차피 요양원은 파트너와 함께 짝을 지어 일하니 해당 근무 시간에 같은 구역에서 같이 일할 동료가 그날 근무의 질을 대부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 머리 팍팍 돌아가고, 돌봄 일이 능수능란하고, 어르신들 응대에 상황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동료랑 일하면 신참인 나도 많이 배우고 일이 덜 고되고 일이 빨리빨리 진행된다. 물론 상대는 신참인 나와 일하는 사실이 고달프긴 하겠지만, 누구나 신참인 시절은 있는 법이니 그러려니 한다.
“Darling, thank you so much!”
입주 어르신들 중에도 입에 땡큐를 달고 사시는 분이 있다. 이런 어르신 돌봄은 자동적으로 힘이 나고 즐겁다. 요양보호사들의 크고 작은 돌봄의 손길마다 땡큐로 감사함을 표현해 주는 분도 계시지만, 언어나 인지능력을 대부분 상실한 분이나 본인의 고통과 아픔이 너무 거대하여 땡큐라는 말 한마디 날릴 여유가 없는 분들도 많다. 그런 순간엔 더 열심히 동료들끼리 땡큐를 날린다. 마땅히 받아야 할 감사를 놓친 경우, 동료끼리라도 서로 챙겨주자는 심정 같다.
80대, 몸을 전혀 못 쓰시는 오지 코카시안 할아버지 R. 퇴근 전 마지막으로 기저귀를 갈아야 할 분이다. 요양보호사들이 기피하는 어르신 중의 한분이다. 뱃살도 없고 몸의 균형이 잘 배분된 뚱뚱하지 않은 몸이나 190센티미터 가량의 장신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이다 보니 기본적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호주의 요양보호사 채용에서는 체력검사나 체격검사를 필수로 넣어야 하는 거 아냐, 지칠 대로 지친 160 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상대적으로 나무 젓가락처럼 홀쭉해 보이는 아시안 출신 요양보호사는 속으로 속절없이 생각하며 방문을 노크한다.
“니들이 케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내 발이 침대 밑으로 나오고 있어.”
기가 막힌다. R은 요양보호사인 우리들이 케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발이 침대로 나오는 게 아니다. 우선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세는 꼭 침대의 머리를 15도 정도 높여줘야 하는데 그 상태에서 놓아 준 베개에 머리를 대지 않고 베개 위로 고개를 15도 정도 왼쪽으로 비스듬히 들고 계신다. 왜 그런 자세를 고집하는지는 본인만이 알 게다. 그 상태론 침대 밑으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오니 요양보호사들이 침대의 발을 15도 정도 올려서 최대한 밑으로 미끄러 지지 않도록 해놓는다. 그렇다 해도 키가 워낙 장신이고 몸 자세가 저러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침대 밑으로 발이 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R은 종종 침대 밑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을 식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우선은 낙상으로 인해 부상이 있을까봐 식겁, 그 담은 온갖 악담을 쏟아내는 R을 호이스트를 써서 다시 들어 올릴 생각에 후덜덜이다. 참고로 호주의 요양원에서 바닥에 넘어지거나 낙상한 입주자는 간호사의 확인 후 반드시 기계를 써서 침대나 의자로 들어 올려야 한다.
낙상이 잦은 R의 침대는 항상 최대한 바닥까지 낮게 내려놓고 양쪽 팔 밑에 베개를 하나씩 받쳐 주고, 침대 양옆 바닥에는 낙상에 대비한 두툼한 매트를 항상 깔아줘야 한다. 워낙 장신이고 체격이 좋다 보니 침대에서 떨어진 날엔 벽과 침대 사이에 바짝 끼어서 몸을 비틀며 손을 떨며 이런 말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니들은 나를 언제 침대로 옮겨 줄 거야?”
“니들이 제대로 침대에 옮겨 줄 수나 있어?”
R의 돌봄은 언제나 두 명이 필수다. 전신을 움직일 수 없으니 벗기고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프린세스 체어(전신을 못쓰면 휠체어에 앉히기도 어렵다)에 앉히고… 모든 일련의 과정에 두 명이 필요하다. 음식을 먹여 드릴 때만 한 명이 필요할 뿐이다. R을 지원할 때는 육체적 피로는 기본이고 거기에 더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는 요양보호사나 간호사들에게 비아냥 섞이거나 무례한 표현들을 일삼고 심지어는 공격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한 남자 동료는 기저귀 갈다 맞아서 귀 밑에 피가 나기도 했고, 나만 해도 팔목을 꽉 잡혀서 놀란 적이 있고, 그 넓적한 큰 손으로 밀침을 당한 요양보호사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경험상 이 분에게서 땡큐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지만, 단지 10시에 마감하고 귀가할 수나 있길 바랄 뿐이다.
“니들은 일을 하나도 제대로 할 줄 몰라.”
“니들은 지금 뭐 하러 온 거야?”
“내 몸에 손도 대지 마.”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우리를 보자 마자 R은 무례하다. 나와 격주로 화요일 저녁마다 짝을 이루는 동료, 플로가 기저귀를 벗기려 하자 R은 순식간에 플로의 팔을 움켜쥐고 쥐어 짠다. 짐바브웨이 출신의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플로가 답한다. 플로는 요양보호사 경력 10여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지금 기저귀 갈아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이 손 놓으세요. 지금 나를 다치게 하고 있잖아요.”
“내 몸에 손대지 마. 니들은 일을 제대로 할 줄도 몰라.”
“지금 기저귀에 똥도 쌌어요. 안 갈면 밤새 냄새 나서 못 주무셔요.”
“간호사를 불러와.”
“간호사는 똥 기저귀 갈 새가 없어요. 입주자들에게 약주기도 바빠요.”
R 과 플로의 대화를 듣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것은 만담인가, 코미디인가, 부조리극인가. 대학 때 부조리극이 뭔지도 모르고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가 순간 떠오른다. 장르를 구별할 수가 없다. 참을 수가 없이 피식 그냥 웃음이 삐져 나왔다. 아마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일을 막 시작한 3시쯤이었으면 웃음을 참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이미 R 만큼이나 정신이 온전한 상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에너지 고갈 상태여서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웃었다고 그는 순식간에 나의 팔목을 때린다. 지친 플로도 응대한다.
“우리가 일을 못 한다니 그럼 직접 보여주세요. 어떻게 똥을 닦고 기저귀를 가는지를 가르쳐 주세요.”
“난 할 수 없어. 니들이 해야 해.”
이번엔 속절없이 혼자서 속으로 웃는다. 내 평생 요양원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실갱이를 하다 10여분이 지났다. 아 속이 바짝바짝 탄다. 요양보호사들은 칼퇴근을 사랑한다. 바깥의 시원한 공기를 이 즈음에 폐에 넣지 않으면 폐가 흐물흐물 시들어 작동을 멈출 것만 같다. 포기했는지 R 이 마침내 기저귀를 끌어 잡았던 손을 놓는다. R을 내 쪽으로 돌린 후, 오른 손은 그의 어깨에 왼손은 그의 엉덩이를 붙잡고 맞은 편의 플로는 그의 밑을 닦고 똥 기저귀를 처리하는 찰나. 으아악. R은 그 상태에서 소변을 본다. 오줌이 침대 커버에 낭자하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그가 오줌을 눈 것이문제가 아니라(맨날 처리하는 게 똥오줌인데 그깟 오줌이야 대수도 아니다) 내 퇴근 시간이 자꾸 뒤로 밀려나고 있다. 아, 야속한 할아버지여.
플로랑 난 번개의 속도로 뒤처리를 한다. 큰 수건을 몸 밑에 깔고 오줌에 젖은 위 잠옷을 갈고, 새 기저귀를 채우고, 오줌에 젖은 침대보를 육중한 R을 좌우로 돌려가며 갈아 씌운다. 지칠대로 지친 요양보호사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순간에도 R의 입은 멈추지 않고 불만을 쏟아낸다.
“도대체 저 분의 정체가 뭐야?”
그 상황에서도 프로 답게 “Good night!”을 날리며 문을 닫고 나온 플로와 나, 동료들에게 묻는다.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면, 사정없이 요양원에 누워있는 어르신도 없다. 각자가 살아 온 운명의 무게만큼 다양한 사정 보따리를 안고 들어오셨을 게다. 이유를 모르면 이해가 되지 않던 상황들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미움과 원망이 아닌 연민과 인간애로 대체할 수 있다.
심한 치매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지, 본인의 신변을 오롯이 책임지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에게 왜 이렇게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터, 이곳에서 오래 일한 동료가 답한다.
“양극성 장애(조울증) 환자야. 어떤 날은 좀 증상이 덜하고 어떤 날은 더 심해. 이제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되지?”
양극성 장애. 얼마전 재밌게 본 한국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첫 화로 등장시켜 강렬하게 조명해 준 정신장애. 드라마, 주변 지인들 가족, 장애관련 책에서나 읽었던 조울증 환자를 내가 돌보고 있다니. 내 직업은 얼마나 파란만장한 것인가, 내가 돌보고 만나는 어르신들의 스펙트럼은 얼마나 다양한 것인가.
나는 장애와는 투쟁하지 않는다. 장애는 내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장애는 그냥 장애다. 내가 노란색 피부를 갖고 태어났듯이 장애도 당사자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란 것을 수 많은 장애인 고객들을 만나면서 깨달았다. 난 더 이상 정신장애를 살아 온 R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애를 지닌 그가 살아왔을 장고의 시간들이 어떠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 장애의 유무에 무관하게 80여년 살아온 삶들은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상실을 살아오면서 상처와 상채기를 남긴다. 그러니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작심한다.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돌봄을 여느입주자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차별없이 제공하기로 작심한다. 이제 그를 애정하지는 않아도 미워하지는 않을 수 있을 거 같다. 요양원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인종차별과 혐오라고 버럭 했을 이런 말을 면전에서 듣고서도.
“내 눈 앞에서 그 바나나 스킨을 치워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