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고봉밥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지 않으면 허기가 지고 허리가 폴더형 핸드폰 마냥 접힌다. 그 상태로 왼쪽 목부터 발까지 마비된 100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어르신을 기계에 태우고 침대에서 휠체어, 휠체어에서 목욕 의자로 옮기는 과정은 지게에 쌀 가마니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듯 무겁다. 어릴 때 산골에 살 때 종종 부모님을 도와 어깨에 메어 봤던 지게질보다 더 빡센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 요양원 요양보호사다. 식은 땀이 등골을 따라 쫘르르 흐른다. 요양보호사 둘이 달라붙어 헉헉 댄다. 속으로 생각한다. 입주 어르신들의 비만은 요양보호사의 근골격계도 침략한다. 그나마 마루 바닥이면 기계가 잘 굴러 가기나 할 텐데, 호주의 카펫 문화를 저주한다.
밥심으로 산다며 평생 땅을 파고 땅을 일구고 땅에 붙어 일하시던 부모님은 항상 고봉밥을 드셨다. 한여름 등목을 하신 후 찬밥을 물에 말아서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만 먹어도 꿀맛이라고 하셨다.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엄마는 순식간에 돌봄의 대상이 되었고, 밤낮으로 놀리던 몸이 쉬는 몸이 된 순간 엄마의 밥맛은 사라졌고 고봉밥도 옛말이 되었다. 식사 때마다 돌봄을 제공하는 세째 딸과 실갱이를 벌였다. 먹이려는 자와 먹지 않으려는 자의 전쟁이다.
“몸을 못 쓰게 되니 손톱을 다 깍아 보네.”
언어 기능을 강타한 뇌경색으로 어눌하게 말을 하며 어색하게 웃으시는 엄마. 중환자실과 일반병실 생활을 청산하고, 세째 언니의 집에서 돌봄을 받던 엄마가 손톱 깍는 일이 어색한 것인지, 본인 손톱을 누군가가 깍아 주는 일이 어색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낯선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평생 아낌없이 돌봄을 제공 “만” 하던 엄마가 돌봄을 제공 “받는” 존재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 여섯째 딸인 나에게는 마구 부자연 스럽만 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 평생을 땅에 붙어 육체 노동을 한 내 엄마의 손톱은 자랄 틈마저 없어 손톱을 깍을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 당시엔 더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교사 시절 급식 시간에 불만이 많았다. 교사들은 순번을 정해 지도를 해야 했고, 급식실에서 학생간 급식판 분쟁이 일어나면 밥술을 뜨다 가도 일어나야 했고, 급식 지도가 끝나고 급식 배당을 받으면 국이나 찌개가 식어서 밥맛이 달아났고, 몇 백명의 학생들과 밥을 먹으니 너무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던 내가 이젠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급식 불평 불만했던 나를 돌아본다. 요양보호사와 장애지원사로 일하면서내 식사 시간은 들쭉날쭉한다. 급식 문화가 없는 호주는 어린 유치원생부터 성인들까지 도시락 문화가 보편적이다. 요양원 일을 갈 때나 긴 장애지원을 할 때마다 나는 도시락을 싼다. 샌드위치, 김치 볶음밥, 샐러드, 컵라면, 파스타 등인데 월요일마다 지원하는 장애 고객하고는 매번 공원 벤치나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림이 있는 곳에서 찬 음식을 먹는다. 추운 겨울엔 김치 볶음밥이나 파스타를 데우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
요양원의 식사 시간은 매번 다르다. 오후 근무는 입주 어르신들의 식사가 끝나고 식사 후의 일정들이 마무리 되면 요양보호사들의 식사가 시작된다. 그것도 같은 팀원들은 순번을 정해서 한 명씩 돌려가며 도시락을 먹는다. 나머지 요양보호사들은 자리를 지키며 어르신들의 호출에 응답해야 한다.
난 평소에 가급적 일정한 식사 시간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저녁으로 라면이나 컵라면은 기피한다. 속을 불편하게 하는 음식들을 멀리하고, 저녁은 7시 이전에 먹어서 잠자리에서 위가 편안한 상태를 좋아하는데, 요양원 저녁 지원을 하면 저녁 식사 시간이 7시가 훌쩍 넘곤 한다. 그렇다 보니 허기진 상태로 도시락을 비운다. 허기진 배에 순식간에 밥을 밀어 넣으면 허기짐이 쉽게 사라지지가 않아서 식사양이 자꾸 늘어난다. 그러니까 결국 고봉밥을 먹는다. 제 시간에 식사라도 하면 바람이 없겠다.
평생 밥벌이로 화물차를 운전한 오빠는 항상 기름지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주로 먹었다. 만삭처럼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며, 왜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지 자극적인 음식 위주로 먹냐고, 왜 저녁 늦게 대식을 하냐고, 왜 이렇게 빨리 먹냐고, 왜 먹자 마자곯아 떨어지냐고, 건강관리는 언제 하냐고, 세상 물정 모르던 선생이었던 나는 아이들 대하듯 오빠에게 입에 바른 소리만 해댔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고 코가 차서 할 말이 없다. 낯이 뜨겁다. 때론 너무 입에 바른 말은 누군가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 된다는 사실, 요양보호사가 되고 나서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교사란 직업을 내려 놓고 3D 직종인 육체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세상엔 바른 식사, 균형 잡힌 음식을 먹고 싶어도 먹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지천에 깔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싱싱한 제철 음식을 먹고, 5대 영양소를 골고루 챙기고, 몸매와 건강 관리를 위해 적당히 먹고, 운동도 곁들이고, 아름답게 세팅 된 음식을 먹는 일, 등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일 뿐, 현실에선 선택지 자체가 없기도 하다.
반평생을 살고 나서 몸 쓰는 노동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부모처럼 몸 쓰는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바득바득 공부를해서 교사가 됐던 내가 돌고 돌아 호주에서 부모처럼 육체 노동자가 되었다. 이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양복을 쪽 빼 입거나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사람들은 눈에 잘 담기질 않는다. 대신 흙이나 시멘트가 잔뜩 묻은 작업화를 신은 사람, 요양원 로고가 찍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 오렌지 색의 형광 안전 조끼를 입은 사람, 작업복을 입은 사람, 작업모를 쓴 사람들이 내 눈길을 잡아 둔다.
매 순간 몸을 써서, 본인의 몸을 닳고 헤지게 하며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관심 대상이다. 애쓰는 노동, 그 노동의 결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쌀을 사는 노동자들이 이젠 나의 동료고 가슴 뭉클한 애정이 담긴다. 칙칙 소리를 내뿜는 압력 밥솥을 보며 생각한다. 내 엄마가 그랬듯 나도 고봉밥을 먹는 사람이 됐다고. 그리고 엄마의 말은 진리였다고.
육체 노동자는 밥심으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