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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Jin Han Nov 01. 2020

과정까지 사랑하다

2006년 2월 깜깜한 밤, 난 뉴욕 캐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 사람들에게도 유례없는 폭설이 내린 겨울이었다. 눈이 웬만한 어른들의 허리쯤 쌓였다.


"언니~, 이모!!!!"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광활한 공황에서 이모와 사촌 언니들을 마주한 나는 너무 반가워서 소리쳤다. 이모네 댁으로 향하기 위해 밖에 나오니,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렸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언니들과 이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짜 뉴욕 생활이 시작되었다. 맨해튼 고층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을 뚫고 영어 학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나는 리스닝과의 전투가 시작된다. 뉴욕타임스 기사를 들고 오는 선생님의 발음과 말의 속도가 내겐 어려웠고, 수업의 95%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회사도 그만두고 영어가 평생의 아킬레스건이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온 뉴욕이었다. 한 달에 200만 원이 학원비와 생활비로 나가는 상황에서 나는 반드시 영어를 극복해야 했다. 그런 간절한 마음에 하루 종일 학원에 있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영어를 복습했다. 심지어 미국에 왔으니 미국 교회를 가야 한다며, 들리지 않는 설교 말씀을 참 꿋꿋이 들었다. 그때 나에게 뉴욕은 패션과 쇼핑, 그리고 각종 문화의 핫 플레이스가 아니었다. 오직 '영어 울렁증 극복'이라는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그 추운 겨울이 더 춥고 힘들게 느껴졌던 도시였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난 일라이(Ely)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단어 몇 개만 사용해서 이야기를 했음에도 내 말을 이해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배운 영어는 잊고 다시 시작하라고. 그리고 자신이 말한 3가지를 지켜달라고 했다. 첫째 가능한 한국말을 쓰지 말 것, 둘째 영영 사전을 쓸 것, 셋째 한국말을 번역하지 말고 영어로 생각하고 말할 것. 그러면 4~5개월 후면 자신이 하는 말의 95% 이상을 알아들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당시는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라이 선생님 말대로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난 선생님 말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선생님 덕분에 영어 울렁증의 목표를 이루었다.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내가 GMAT 선생님에게도 칭찬을 들었으니, 어쨌든 목표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 그래서 그 시절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성취지향의 모습보다 그 과정을 사랑하는 법도 배우라고 말이다.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목표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해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살아보니 그건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과정을 사랑하는 삶이 흔히 이야기하는 '카르페디엠'의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를 위해 달려가면서도 얼마든지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다. 그 과정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지라도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만끽할 수 있는 법이 있음을 그 당시 나는 몰랐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올인해 버리면, 다시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꽤 열심히 맨해튼 거리를 걸었다. 화려한 문화생활과 다양한 음식들, 쇼핑을 즐기진 못했지만, 걷고 걷고 또 걸으면서 좀 더 느리게 맨해튼과 뉴요커의 삶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이 반드시 화려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화려한 불빛 속에 어둠이 있었고, 번성함 속에 치열함이 있었고, 번듯함 속에 냉정함이 있었다. 그래서 엽서 속에 보이는 뉴욕은 뉴욕의 모습에 1%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목표가 있다는 것은 성실할 가능성이 높고, 자기 발전과 성취할 수 있다는 장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목표에만 몰입할 때의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키가 크는 것에만 몰두한다면, 아이와 교감하는 시간, 옹알이하는 순간, 첫걸음을 떼는 모습, 웃고 우는 이유를 놓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 시간의 과정까지도 즐기면서 영어를 공부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Dear J

J야, 뉴욕에서 영어 울렁증 극복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해. 적어도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한정된 돈으로 생활하기 위해 덜 사 먹고, 그 흔한 뮤지컬 한번 보지 않은 너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앞으로는 성취지향의 삶보다는 과정까지도 즐기는 단계로 넘어가 보자.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과정을 즐김으로써 난 매 순간이 더 감사와 행복할 것이고, 그 행복과 감사가 의도하지 않게 놀라운 성취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결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과정의 시간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과정 가운데 실패가 있을지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이젠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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