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남동생이 유일한 형제다. 무려 자식을 7명이나 낳으셨던 할아버지와 비교하면 나의 아버지는 나와 동생 2명으로 마무리를 하셨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가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셋째를 가지셨다가 유산이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전혀 일면식도 없었고 그냥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혹여 그 여동생이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가끔 가지고는 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남동생과 사이가 안 좋으면 그래도 동생이 하나 더 있으면 그나마 대화가 되고 가끔씩 위로도 좀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동생과 나는 어릴 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다. 늘 같이 붙어 다니고 날 잘 따르는 그런 동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그때부터 집을 떠나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늘 같은 집에서 얼굴 보고 같이 놀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올 때마다 얼굴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때 나는 한창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었고 처음 하는 유학생활이 힘들었던 때였다. 동생과 다시 한 지붕아래 같이 살게 된 것은 내가 고3으로 올라가고 동생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동생도 나와 같은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내 부모님은 혼자서 하숙을 하던 당시 나와 동생을 위해 할머니를 보내셨고 그때부터 할머니, 나, 동생 그리고 큰고모의 아들인 사촌동생 그렇게 4명이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 난 늘 공부와 씨름하였고 예민해서 말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같은 집에 살면서도 동생하고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없다. 그저 난 그 해 일 년의 시간이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기 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해서 자연스럽게 나는 동생과 또 떨어져 살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에 가면서 이제는 동생이 고3이 되고 공부에 빠져 살게 되었다. 동생은 고등학교가 있었던 같은 도시의 지방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더 이상 나와 같은 집에서 지낼 일이 없어졌다.
이렇듯 동생과 나는 자아를 찾아가는 사춘기와 청춘의 대학생활을 보내면서 남들처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소소한 일상을 얘기하거나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의 걱정을 공유하고 위로해 주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너무 내성적이었던 나의 성격 때문에 외향적이었던 동생이 많이 힘들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와 동생은 형제 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교류가 없었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거나 동생이 나를 너무 어려워했거나 아니면 이런 관계를 내버려 둔 나의 부모님 중 하나는 분명 잘못이 있었다. 나의 유년 시절 기억에 내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가족 여행을 갔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가족이지만 형제간이지만 나는 동생을 잘 모른 체 어른이 되었고 동생도 나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가 어른이 되고 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리고 동생도 결혼을 해서 자기만의 가족이 생겼다. 각자의 가족이 생기면서 나와 동생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고 명절 때가 아니면 서로의 얼굴을 보거나 안부를 묻는 일이 없어졌다. 명절 때 만나도 그 서먹서먹한 관계는 계속되었고 며칠 동안 각자의 방에서 티브만 보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결정적으로 동생과 내가 멀어지게 된 계기는 내가 호주로 이민을 오면서부터였다. 같은 나라에 살 때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이였는데 먼 나라로 이민을 가면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보던 것도 힘들게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장남인 내가 해야 할 책임들도 자연스럽게 동생의 몫이 돼버린 후에는 동생은 조금씩 나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이민을 떠나는 과정에서 동생에게 제대로 된 설명과 부탁을 하지 못했다. 나의 잘못이 무엇보다도 크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모국 방문이 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동생은 형 노릇까지 해야 하는 마치 형으로 인해 예상치 않았던 인생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도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래도 동생은 나를 참 많이 배려해 주었다.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동생도 가족이 있었고 처가도 있었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그 미안함에 다시 연락하기 힘들어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로 인해 연락하기 힘들어졌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지금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동생한테는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릴 수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지나면 언제가 나의 모든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동생과의 연락은 이제 끊어진 상태이다. 연락을 해도 안 받는다. 아니 안 받겠다고 했다. 이해는 되면서 좀 서운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언젠가 내가 충분히 설명하고 동생이 기댈 수 있는 형이 될 날을 꿈꾼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만약에 나에게 유산된 여동생이 있었더라면 나와 내 동생의 관계에 좀 역할을 해 주지 않았을까 상상을 하곤 했다. 물론 오히려 더 나빠졌을 수 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나도 우리 부모처럼 자식이 두 명이다. 같은 동성이다. 나와 내 동생과 비슷하게 둘 다 어릴 때에 참 잘 지냈다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둘 사이에 빈틈이 보였다. 최근에는 첫째가 혼자 독립을 하였고 둘째 딸만 나와 여전히 같이 사는데 그러다 보니 둘 사이가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가끔 집에 다 모이면 그래도 대화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서로가 서로를 안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우리 부모처럼 방관자는 아니다. 적어도 둘 사이를 좋게 만들려고 자주 뭔가의 이벤트를 만들려고 하고 같이 좋은 카페도 가고 같이 좋은 식당도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동생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에 대해 많이 후회하고 미안하고 더군다나 일찍 고칠 수도 있었는데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를 많이 하기에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우리 두 딸들은 좀 더 좋은 자매사이가 되기를 원한다. 살면서 분명히 기대고 의지해야 할 때가 온다. 친한 친구나 가까운 동료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공유하고 싶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형이나 언니나 동생이 생각나게 되어있다. 나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 방관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부모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아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고 둘 다 20대가 되고 나니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했던 원망들은 오히려 나의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들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 하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렇게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라도 내가 했던 그 원망에 대해서 반성한다. 어쩌면 내가 그리고 나의 아내가 스스로 증명하고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내 동생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아내가 아내의 동생이나 언니들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더 바른 길이고 더 나은 설루션이 아닌가라는 것을 최근 들어서 느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들어도 따뜻하지만 가족이라고 다 친하고 다 들어주고 다 이해해 주고 다 용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요즘에 드는 생각은 가족끼리 사랑보다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이 더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이 든다. 막연한 사랑보다는 어느 정도 상대방의 것들을 존중해 주는 태도들이 서로 간의 관계를 더 좋게 유지시켜 주고 더 오래 가게 하는 듯하다. 가족끼리라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마구 선을 넘어서는 순간 조금씩 금이 생기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 결국엔 유리처럼 산산조각 깨어지게 되고 다시 붙일 수 없는 관계로 변해 버린다. 어쩌면 내 동생이 화가 난 것도 나의 사랑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동생이나 동생의 가족들에 대한 나의 존중이 부족했음 때문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