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셋에 첫째 딸이 독립을 했다. 아내와 그전에도 많은 얘기를 해 왔고 나름 계획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 시간이 빨리 왔다. 역시 세상에는 내가 계획한 대로 잘 될 때보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첫째 딸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고 바로 월세방을 구하고 새로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사고 이것저것들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면서 정신이 없었지만 생각보다 모든 것들이 금방 끝나게 되었다. 돈이 많은 것들을 쉽게 해결해 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허탈하기도 했었다. 좌우지간 첫째 딸은 그렇게 원하던 자기 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너무 좋아했고 설레는 맘이 얼굴에 다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살짝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20년을 넘게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살았던 첫째 딸이 나간다고 하니까 사실 처음에는 아쉬움, 걱정, 미안함 등등의 감정들이 몰아쳐 왔지만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니까 잘한 결정이라는 말로 나와 아내는 서로를 위로해 주고 있더라. 그렇게 첫째 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면서 부모의 집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런 딸을 보면서 자식이 행복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구나라고 생각을 좀 했다. 독립을 하고 나서도 첫째 딸은 자주 집에 와서 저녁도 먹고 나와 아내도 첫째 딸 집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랬다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첫째 딸은 집에 오는 횟수도 줄어들고 나와 아내도 첫째 집에 놀러 가는 시간이 점점 줄고 특별한 일이 생길 때 만 가게 되었다.
그렇게 독립을 하고 한 달도 채 안될 즈음에 어느 날인가 예고 없이 첫째 딸 집에 갔었는데 첫째 녀석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모르는 체하고 같이 음식도 먹고 넷플릭스로 영화도 보고 하니까 딸의 표정이 좀 많이 나아졌다. 그러다가 디저트를 같이 먹는데 갑자기 딸이 속내를 말을 하면서 사실은 최근에 좀 외로웠다고 했다. 맨날 아빠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고 했다. 누구의 방해를 안 받고 혼자 사는 게 처음에는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서 외로움이 막 밀려들더라는 거였다.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뒤집은 그 말을 듣고 아내와 나는 사실 좀 놀랐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나는 자연스럽게 딸이 좀 더 걱정이 되었고 가끔씩은 아무런 이벤트가 없어도 딸한테 가서 뭐 특별한 것을 하기보다는 그냥 같이 시간을 보내주고 집으로 오곤 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눈치를 챘는지 첫째 딸도 계속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기 싫어서 그 이후로는 주변의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서 나름 집들이 이벤트를 만들어서 스스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뭐든 새로운 환경에는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딸에게 조언했던 기억이 난다.
첫째 딸이 독립을 하고 달라진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아내와 내가 가끔씩 첫째 딸 집에 가면 첫째 딸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못하게 한다. 가령 저녁을 먹으면 요리도 주로 자기가 다하고 상을 차리고 마지막에 설거지도 혼자서 다 한다. 그래도 미안해서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딸이 뜬금없이 우리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쉬고 가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못하게 한다. 그런 모습을 본 아내는 독립시킬 만하네 대견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마치 우리를 손님처럼 대하는 것 같다고 싫어했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나는 독립시키면서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잘 살고 있는 딸을 보면서 기특하다는 두 개의 감정들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한참 나중에 이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와서 깜짝 놀랐다.
한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첫째 녀석도 우리 집으로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아내와 나도 바쁘게 지내면서 첫째 딸에게 무관심하게 지내던 어느 날에 첫째 딸이 저녁을 집에서 먹고 싶다고 해서 왔다. 아내는 일을 끝내고 오자 마자 오랜만에 온다는 첫째 녀석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도 오랜만에 딸이 온다고 해서 기대하면서 아내의 저녁 차림을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온 첫째 딸은 무척 피곤해 보였고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바로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빠져 들었다. 아내와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일단 저녁을 빨리 준비해야 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첫째 딸은 저녁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 폰으로 누군가랑 열심히 채팅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잔소리를 했다. 스마트폰 그만하고 저녁 상 차리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그런데 첫째 딸로부터 돌아온 대답에 순간적으로 아내와 나는 아무 말을 못 하고 잠시동안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 녀석에게서 온 대답은 바로 “아빠, 나는 이 집에서 손님 아냐?” 그 뒤에 일어났던 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아무튼 그 말에 너무나 놀라고 서운했던 아내는 첫째 녀석을 참 많이 나무랐고 나는 그런 아내를 그냥 두었다. 나도 아내도 처음으로 독립시킨 것을 후회한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문득 나의 과거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던 때를 회고해 보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에서 독립해서 하숙집에서 살게 되었다. 부모님 집에는 주말 아니면 방학 때에나 가곤 했었다. 당시에 주말에 부모님 집에 가게 되면 나는 평소에 부족했던 수면으로 인해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쉬다가 엄마가 미리 다 해 놓은 빨랫감을 챙기고 일요일 저녁에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말수가 없었고 붙임성도 부족했다. 말 그대로 살갑지 못한 큰 아들이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에게 별일 없으셨는지 아니면 농사일은 힘드시지 않은지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건강은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보곤 했어야 하는데 사춘기 여드름이 잔뜩 난 나는 동굴 속에 사는 곰 같았다.
그러니 엄마를 도와 저녁 상을 차리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엄마가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할 때 옆에서 반찬이라도 나르거나 수저라도 놓으면서 도와주지도 않았을 뿐 만 아니라 학교 생활 하숙집 생활 등등 궁금한 게 많으셨을 부모님에게 별 말도 없었다. 가끔씩 농번기 때 맞춰서 가면 부모님은 오랜만에 오는 당신의 아들이 객지에서 힘들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바쁜 농사일을 헐레벌떡 마치시고 정신없이 돌아왔어도 나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에 시달리거나 잠이 모자라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부모님 집에 가면 늘 아무것도 안 했다. 당신들도 시키지도 않았다. 가끔씩은 내가 뭘 하려고 하면 부모님은 애당초 못하게 말리셨다. 그렇게 말리시는 부모님의 말씀에 나 자신도 별로 반응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내가 부모님 몰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평소 하기 힘드신 것들을 일부러 찾아서 하지도 않았다. 마치 첫째 딸이 우리 집에 와서 말한 것처럼 그 시절에 나도 어쩌면 손님처럼 왔다가 갔었던 것 같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의 부모님은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첫째 딸의 행동과 말에 실망했던 것 같이 우리 부모님도 똑같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딸에게 잔소리를 했던 것들이 부끄럽게 다가왔다. 내가 과연 우리 딸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나 싶었다.
첫째 딸과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한동안 예전의 내 행동을 생각하면서 내 부모님에게 때늦은 반성을 했었다. 그 유년 시절의 나의 행동들에 대해서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 고모들이나 삼촌들이 명절 때나 아니면 가족들이 다 모이는 일이 생기면 늘 내 부모님에게 나를 너무 금지옥엽으로 귀한 자식으로 키운다고 말씀들을 하곤 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너무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런 특별 대우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더군다나 한창 사춘기를 지나는 시기에 그런 말들이 조금은 많이 불편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들의 말들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부모님은 정말로 나를 그렇게 키우셨고 당신들이 힘들게 자랐던 것들에 대한 보상 심리였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를 그렇게 키우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자란 이유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자식으로 자랐다고 여겨졌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아내의 집안일을 잘 도와주지 않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살면서 생기는 집안 곳곳의 문제점도 다른 남자들은 스스로 고치는데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서 늘 사람을 따로 불러서 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나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나의 모습에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하는 걸까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참 많이도 던졌다. 결국 답은 그런 것들이 내 몸에 베지 않고 성장한 어린 시절의 습관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도 한동안 나의 그 나쁜 습관들은 계속 이어졌고 그로 인해 아내의 육아는 점점 더 힘들어져 갔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매일매일 야근 그리고 주말 근무까지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집에 오면 더 이상의 에너지가 없었고 주말은 다가올 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에너지를 충전했어야 했고 그런 거지 같은 삶들이 매일매일 연속이었다. 결국은 아내에게 병이 생기고 나는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했었다. 그때가 내가 호주 이민을 계획했던 시절이었다. 호주에서의 살면서 비로소 내가 조금씩 바뀌었다. 여전히 집안일의 대부분을 아내가 했지만 점점 내가 육아와 가정일을 도와주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호주 회사는 한국처럼 야근과 주말 근무를 강요하지 않았고 퇴근시간이 너무나 일정했고 더군다나 가족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 굉장한 서포트가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힘들고 외로운 이민 생활이었지만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지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면 살았던 시기었다. 몇 해 전부터 아내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빨래, 청소, 설거지 등등 그동안 잘하지 않았던 일들을 직접 하면서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동안의 아내의 노고에 감사해했고 더 빨리 많이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를 했었다.
아내와 내가 호주에 와서 호주의 문화중에서 배우고 정말 꼭 따라 해야 하겠다고 했던 것들 중에 하나가 아이들을 정말 독립적으로 키우는 호주 부모님들의 자세였다. 그래서 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꼭 그렇게 키우고 어릴 때부터 스스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습관들을 길러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게 말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제대로 하려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좀 무덤덤 해져야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줄 수 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와 아내는 늘 그 중간에서 포기하고 문제가 생겨서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중간에 끼어들어서 해결을 대신해 주곤 했었다.
아무튼 첫째 녀석이 독립을 하면서 아내와 내가 기대했던 것은 딱 하나였다. 뭔가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습관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밟았던 나쁜 전철을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기를 원했다.
호주에 살게 되면서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은 늘 보고 싶음에 목마르셨다. 매주 매주 전화를 해도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는 듯 보였다. 몇 해를 걸쳐 오랜만에 한국 방문을 하면 예전에 내가 하숙하던 때와 같이 또 대하려고 한다. 마치 군대 갔다가 휴가를 온 마냥 맛있는 반찬을 차리시고 잠자리까지 챙겨주시고 설겠지를 도우려고 하면 못하게 말리시고 힘든 청소를 하려고 하면 여전히 못하게 하시고 나를 우리 가족들을 손님처럼 왔다가 가게 만드신다. 그때마다 부모라는 그 무거운 어깨가 느껴지고 이제 팔순을 넘으신 두 분의 뒷모습이 더 작아 보이신다.
첫째 딸이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문자를 보냈다 - "아빠 미안해, 앞으로는 더 좋은 딸이 될게. 사랑해"
나도 카톡으로 아버지에게 톡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