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콜버트 '이수스 대전 모자이크화의 재해석'을 보고

2025.04.06. 목요일의 기록

by 허건

랍스터는 이론상 영원히 산다고 한다. '텔로미어'라는 수명을 담당하는 세포가 끊임없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텔로미어'는 쉽게 말해 신발 밑창과 같다고 한다. 인간은 신발 밑창이 모두 닳으면 죽지만, 랍스터는 DNA상의 신발 밑창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수스 대전 모자이크화의 재해석'(이하 이수스의 재해석)이라는 작품은 영원히 사는 랍스터와 영원히 존재하는 인공지능 기계 문명과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끄는 이유는 가장 크고 웅장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며 장난 같았던 '랍스터'의 이미지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맘먹었다.

작품 전체적으로 랍스터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현대인은 자신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SNS와 디지털 세상 속 남긴 기록들이 영구적일 것이라는 착각이다. 현대인은 디지털 문명의 기술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텔로미어'를 회복한다.

작품 해석본에 내내 설명되는 NFT(대체 불가 토큰), 인공지능, 디지털, 메타버스, SNS 등의 키워드는 영구적인 삶,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다.

'이수스의 재해석'이라는 작품은 말 그대로 기존이 고전 작품에 대한 패러디, 오마주를 담은 작품이다.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화'는 알렉산더 대왕의 승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실제로 이탈리아 나폴리의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랍스터는 죽어서 껍데기와 고기를 남긴다. 알렉산더 대왕은 짧은 생을 살다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대인을 상징하는 랍스터와 고전 작품의 콜라보, 재해석을 통해 작품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론 상 영원히 산다고 하는 랍스터일지라도 정말로 영원히 사는 랍스터는 없다고 한다. 잡아먹히거나 탈피의 과정에서 대다수의 랍스터가 죽는다고 한다. 갑각류 동물은 탈피의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라는 말의 이면에는 '나를 죽이는 고통은 나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탈피를 통해 성장하는 랍스터는 탈피의 과정에서 숱하게 죽어간다. 죽음은 늘 곁에 있다는 '메멘토모리'라는 말. 랍스터에게 성장이 죽음을 견디는 일인 것처럼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삶도 성장하기 위해 도전하고 깨뜨린다.

스스로를 깨뜨리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인간은 서서히 죽어간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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