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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몰입 2022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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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영 Oct 30. 2022

출산 소회

내게 남겨진 자유를 언제든지 침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일

우리는 모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각자의 탄생 드라마를 시작으로 생의 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내 이름 세 글자가 스템프로 찍힌 페이지를 연도별로 넘기며 산다. 끊이지 않는 삶의 성장통은 옵션이다. 그 연장선 안에 결혼이 있고 출산이 있다. 싱글 미스와 미스터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삶의 거대한 변곡점을 맞이한 것이다. 


탄생은 생명 신비의 고통과 경이로움을 뒤로 바쁘게 쫓아 들어오는 부모라는 명찰을 이어달리기 바톤 하나 건네받듯 순식간에 넘겨받는다. 그런데 받아 든 바톤이 생각보다 묵직하다. 40주 넘게 몸 안에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의 실물을 맞이하는 일을 목도하면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 현실이 되는 머뭇거림에 당황한다. 진짜 이 생명체가 내 몸 안에 있었다니! 초음파 흑백 사진으로만 존재하던 인물이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불러오는 배를 보고도, 태동을 느껴도 무성영화를 본 듯 믿기지 않았는데 말이다. 


휘몰아치는 영아기를 집약적으로 경험하면서 CPR(심폐소생술)을 하듯 수시로 육아에 진이 빠진 나를 일으키는 무수한 하루가 반복된다. 버티기와 기다림의 사리를 몸 밖으로 연신 방출하며 ‘이 지긋한 삶이 언제 끝날 것인가’만 되뇌인다. 단언컨데 이번 생에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진실된 촉이 발동한다. 출산을 준비한다면 이 민낯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혼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수 차례 말하던 조르바(책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작품>)처럼 온전히 혼자였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내 자유 또한 온전히 지켜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출산이란 아이에게 앞으로 내게 남겨진 자유를 언제든지 침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일이니까.     


아이들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떠오르는 출산의 기억은 10년이나 읊조리는 라떼 레퍼토리가 됐다. 이야기는 임신 주수를 모두 채우고도 아기가 나오지 않아 결국 분만병동으로 입원해 밤을 지새우는 파트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2박3일을 뜬 눈으로 버티며 출산한 기가막힐 노릇의 이야기가 매년 결혼기념일보다 먼저 떠올려지는 얘기로 회자되겠지. 아마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스스로 오래오래 퍼뜨릴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정말로 내가 죽다 살아난 실화니까. 생의 반만 알던 내 생일을 거쳐 나머지 반의 이면을 모두 알아차린 아이의 생일로 탄생 신화의 조각이 완성된 시절이었으니까. 친정엄마가 출산이 임박한 딸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왜 그렇게 눈가가 촉촉해졌는지 이제는 분명히 안다. 딸의 묵직한 걸음걸이가 본인이 만삭이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추억하는 출산의 숙명에 목이 메였던 것이리라.     


죽을 고비의 문턱에 있는 출산은 이승과 저승을 한 발씩 내딛고는 어느 쪽으로 발을 모을지 마지막까지 신경전을 벌인다. 육아에 지쳐 출산의 상흔을 잊은 채 엉덩이를 의자 앞으로 쭉 빼 대충 걸쳐 앉다가도 이내 바른 자세로 곧추세우게 되는 것이 출산의 기억이다. 그리고 지긋한 육아가 나를 집어삼킬 듯 다가오거나, 바닥난 자존감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볼 때 내가 해낸 가장 용감한 일로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한다. 출산은 삶에서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축복 중 하나다.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나야 만나는 경이로운 신비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온 묵직함을 해소한 뒤 흐르는 눈물이 말해준다. 죽지 않고 살았다고. 


더불어 언제든지 내 자유를 수시로 침범할 수 있는 권리를 떼어주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출산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자유침해에 대한 허락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당신의 자유는 아직 온전한지, 출산의 민낯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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