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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쓱쓱 Oct 05. 2024

정신의 가난

할아버지의 일침

 TV  속 할아버지는 폐지를 줍는 분이셨다. 


 샛별이 살짝 사라질 때 즈음 일어나 이른 아침을 간단하게 드시고는 리어카를 정비하셨다. 

 어둠 속에서 할아버지는 일사불란했다. 미리 준비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장갑과 모자를 챙기는 움직임이 명료했다. 그 움직임에는 반복적인 삶이 주는 안정감과 단순함이 배어있었다. 그렇게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발걸음은 군살이 내려앉을 시간이 없이 가볍고 민첩했다. 


 할아버지는 이른 시간 밤새 상점이나 주택에서 내놓은 종이 상자들과 폐지, 재활용 품등을 선별했다. 

 박스에서 테이프를 떼어내 펴서 반듯하게 접은 후 리어카 안쪽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레이터망에 걸린 물건들이 성실하게 쌓였다. 


 숙련된 움직임과 스킬은 고요했지만 정확했다. 번잡스러움도 소란스러움도 없었다. 수년째 반복하고 있는 동작은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수년동안 확보한 나름의 구역과 체크 포이트를 빠트리지 않고 하나씩 클리어해 나갔다. 

 어제는 없었지만 오늘은 있는 곳도 있었고 오늘은 없지만 내일은 있을 곳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폐지 줍기는 점심때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몇 번은 쉴 만도 한데 할아버지는 멈추지 않으셨다. 

 모든 움직임이 자기만의 페이스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서두름에 따른 부화가 없어 보였다.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 원하는 행동을 일정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높은 수준의 자기 조절을 이미 습득하신 듯 보였다.


 간단하게 점심을 드신 후에는 다시 리어카를 정비하셨다. 

 쌓아 올린 박스와 팔릴만한 물건들이 사이사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좀 더 공간이 만들어졌고 각자 편안하게 자리를 잡기 위한 조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덕분에 할아버지의 리어카는 균형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오후 작업은 오전 작업과 동일했다. 체크 포인트와 구역별 핫 플레이스를 점검하고 박스와 종이 등이 발견되면 천천히 다가가 박스와 종이를 정돈하여 리어카에 실었다. 

 그렇게 오후 4시까지 이어진 작업은 고물상을 거쳐 마무리되었다. 


 그날 할아버지가 하루 종일 폐지를 주어 번 돈은 1만 원이 채 안 됐지만,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할아버지가 잠시 언덕 위에 서서 아래 펼쳐진 동네 풍경을 바라보시는 옆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사색에 잠긴 눈이 고요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 편안했다.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종일 뒤덮여있던 먼지를 깔끔히 씻어내고 책상에 앉았다. 

 작은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를 배경으로 방안 전체에 책장이 둘러있었고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담당피디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다 읽으신 책이에요?"


 얕은 미소를 머금고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요. 지금까지 제가 읽은 책들이에요."


 할아버지의 책장에는 자본론이나 수상록, 자유론,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서양 고전 철학과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와 같은 동양고전 철학은 물론 카뮈의 이방인과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소설들이 빼곡했다.

 

 담당 피디가 놀란 목소리로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책을 많이 읽으셨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철학과 인문학, 과학과 사회학을 알아야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폐지를 주어 모은 돈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본인은 기초수급으로 살아가시는데, 전체 금액의 10%는 항상 책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신다고 하셨다. 


 담당피디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신은 책을 많이 보지 못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면서 일침을 날리셨다. 


"그럼 정신이 가난하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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