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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꿈

무의식의 힌트들

by 쓱쓱 Jan 31. 2025

 한창 키가 자랄 때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높이 뛰며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살짝 내려앉아 발을 힘차게 구르면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부양했다.


 붕붕.


 붕붕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느낌으로 나는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다.

 그렇게 한번 하늘로 날아오르면 한동안 공중에 머무를 수 있었다. 

 무중력 상태처럼 붕 뜬 느낌으로 살짝 아래를 바라보면 세상은 작고 오밀조밀했다. 

 상당한 시간 동안 몸 안에 스며든 공기와 동화되었고 응집된 공기가 바람이 될 무렵 몸 안에 서늘함이 맴돌곤 했다. 

 꿈이라는 어렴풋한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감각이 실체처럼 생생한 게 참 신기했다. 밤새 세상을 날아다녀서인지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온몸이 찌뿌둥했다. 엄마는 키가 더 크려나 보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성인이 된 후, 나는 종종 곤란한 꿈을 자주 꾸었다. 

 악몽까지는 아니더라도 밤새 진을 다 빼놓는 그런 꿈들이었다. 

 그중에는 몇 가지 레퍼토리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면서 재생되곤 했다. 


 자주 꾸던 꿈 중에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높은 곳을 찾아 오르는 꿈이 있었다. 

 재난 영화의 단골소재인 쓰나미는 순식간에 도심을 덮치고 모든 것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거대한 물은 자비도 여지도 허용해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물에 대한 공포는 꿈속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나는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쓰나미를 뒤로 한채 필사적으로 달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극한에 이르러서야 겨우 높을 곳을 찾아 기어올랐다. 그러다 다시 물이 거세게 들이닥치면 더 높은 곳을 찾아 사방을 헤매는 꿈이 반복되었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들이닥치는 거대한 물살 앞에 나는 항상 극도의 긴장과 절망 사이를 오갔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한 번도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높은 곳을 찾기 위해 처절하게 몸을 움직였고 결국 아침에 눈이 떠질 때까지 도망 다닐지언정 언제나 살아남은 상태였다.


 또 다른 꿈은 자주 버스를 못 타는 꿈이다. 

 매번 비슷하거나 거의 유사한 지역과 건물들이 나오는데, 나는 매번 버스를 못다 집에 가지 못한다. 

 정차역도 거리도 너무나 익숙한 곳임에도 나는 도대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많은 버스를 그냥 보내고 멍하니 남겨졌다. 

 스스로 너무나 답답해하면서도 집에 가는 버스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에는 아무리 버스 노선을 검색해도 로딩 중으로만 떠 있는 상태가 지속된다. 

 화면 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원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강해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다 잠에서 깨면 목이 매였던 흔적이 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꿈에서조차 목이 매였을까.




 이제는 상식이 되었듯이, 프로이트 선생님 이후 인간에게 꿈은 완전히 재의미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의식이며 꿈이야말로 이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알려졌다. 

 꿈은 인간이 억압했던 욕망과 감정들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인간의 삶에 필요한 다양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만약 그렇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후 꿈이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은 융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융은 꿈 분석을 통해 자아가 진정한 자기와 연결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열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의 무의식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꿈을 통해 끊임없이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의식의 구체적인 발현인 꿈에 관심을 기울이고 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험하면 우리는 보다 풍요롭고 촉촉한 삶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거대한 쓰나미에 쫓기거나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거나 마지막 비행기를 타지 못해 남겨지는 꿈에 시달리고 난 다음날엔 스스로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요즘 나의 삶은 대략 어떠한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혹시 실제보다 과대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거나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본질적인 감사와 즐거움을 모두 내쫓고 있지는 않는지.

 꿈이 내게 알려주는 내 안의 원형적 무의식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비록 미숙하고 어설프지만, 그렇게 더듬더듬 찾아가 보려 한다. 

 어떤 것이든 의미란 결국 발견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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