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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Feb 05. 2020

나의 무너지는 세계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



 정확한 시간조차 알 수 없는 세계 위에 있다. 바다 위, 흔들리며, 좀 더 저어 가는 중. 서프보드 위에서 열심히 패들링을 하며 파도 몇 개를 넘어서고 나면 만날 수 있는 세계는, 흔들림은 죄악이고 불안은 미성숙한 인간의 것이라는 어리석고 견고한 믿음과 법칙이 바로 설 수 없는 곳, 모든 것이 흔들리는 곳에서 제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되려 허망하다. 그러니 내려놓아야 버틸 수 있다. 이곳에선.






바다에게도 심장이 있다면, 부서지는 파도는 뛰는 심장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땅을 지향한다. 어떤 날엔 즐겁고 어떤 날은 차분하고 가끔은 울기도 하는 듯이, 뛰었다. 그리고 파도 앞에 놓인 모래성처럼 어떤 개념이나 추상도 8초에서 9초 간격으로 찾아오는 물의 집단성 앞에서는 무너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개념이 무너지고 상식이 무너지고 당신들이 사라지고 나면, 바다 위엔 나와 파도만 남는다. 파도 위에 서는 나만 있다. 몇 초 간격으로 흔들리며 나는 다가오는 세계를 붙잡는다. 오늘의 세계는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런 날에는 나도 자꾸 웃게 된다. 이곳에선 뭍에선 도무지 지을 수 없는 표정을 잔뜩 짓곤 한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래서 바다가 좋다.





 파도를 넘어서며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세계는 점점 더 견고해져 가고 나는 이 멋진 세계에서 영영 살고만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잠시나마 이곳에서 내가 짓는 표정들이 저쪽 너머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옮겨놓는다는 걸 생각하며 안심한다. 바다에 뛰어든다는 건 어떤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자 매 순간 흔들리겠다는 다짐이다. 서프보드 아래의 세계는 땅에 닿으며 무너지고 있다. 점점, 아름다운 방법으로. 나는 다시 세계를 붙잡기 위해 파도를 넘는다. 저쪽 너머에 있다. 나의 사랑하는 세계가.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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