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화
아빠의 편지에는 자작시가 많이 나온다. 아마도 방송사에 소개된 시가 한 편 있는 모양이다. 이번 편지에 아빠는 그 시를 옮겨 적고 싶었으나 원고가 본가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시절의 편지를 읽다 보니 아빠는 당시 직장 때문에 여수나 경주 등을 오갔던 것 같고, 엄마는 본가인 광주에서 지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나는 신문방송학 전공이면서 문예창작을 복수 전공했다. 당시 소설 창작, 시 창작 등의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때마다 느낀 감정은 내 작품이 단순한 글의 나열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작가에게 자신의 쓴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 그 자체이다. 누군가 읽어주기 전에는 멈춰있는 그런 세계.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자를 갈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독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다. 물론 나만큼 그 세계를 사랑한다는 전제 하에.
그러니 아빠가 엄마에게 시를 보여주려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나도 내가 쓴 모든 소설을 당시의 여자친구에게 전부 보여줬었다. 현재 내 아내인 그녀는 당시 내가 쓴 소설이 조금 어렵다고 말했던 것 같다.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잊고 지낸 짧은 단편들을 다시금 꺼내어 읽어보면, 그동안 그 속에서 멈춰있던 등장인물들이 다시 살아나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창조자에 가깝다.
그러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가끔 상상한다. 사람들에게 잊힐만하면 영화로 제작되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관광지가 개발되고, 이이들은 다시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한다. 그러면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런 세계를 만들어낸 기분은 어떠할까.
사실 아빠가 정말로 본인의 자작시를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선보이려니 조금 더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작품을 꺼내놓는 일은 내가(혹은 내 작품이) ’하나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서야 비로소 그걸 깨우치게 된다.
”완성된 것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요. 일단의 시상의 나열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걸 깨우쳐주어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