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킴 May 18. 2024

조금 기다렸으리라 저 혼자 착각하지만은.

아빠의 3화


그간 일기가 좋은 편은 아닌데 잘 있었는지, 아침 저녁 일교차가 커서 약간은 추운 날씨지만 맑은 하늘이 정말 가슴을 저미는 것은 어쩔 수 없읍니다.


요즘은 5시 퇴근이라 시간이 좀 더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읍니다. 경주 다녀온 후 전화를 하려 했지만 빨리 못하고 그때서야 하게 되었어요. 조금 기다렸으리라 저 혼자 착각하지만은.


경주에서 많은 신혼부부를 보고서 나 아닌 다른 유부남 직원들까지도 샘이 나서 장가 한 번 더 가야겠다는 이야기가 이구동성이었습니다. 참 보기 좋은 한 쌍들이 많더군요. 새벽에 토함산에 올라가 석굴 안에서 전망대에 직원들을 남겨둔 채 혼자서 일출을 보았읍니다.


자욱한 구름, 들판 속에서 황홀하게 솟아오르는 불덩이를 보고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읍니다. 왠지 가슴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어 뛰기 시작했읍니다.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그때 상황을 표현하긴 힘들어요. 내 스스로 잘 그러하니까.


일출 보는 곳에서 일출을 보던 동료들과 합류하여 사진을 찍고 불국사로 내려왔습니다. 인위적인 모방으로 전통들이 잘 가꿔지는 것은 좋지만 태고의 자연미가 점점 없어져 가는 것만 같았읍니다.


일요일 해인사에 들렸다가 밤 열 시 반경에 숙소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읍니다. 반기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전할 소식이 있어요. 내가 럭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 남 대신 연습하러 나갔다가 감독인 예비군 중대장이 보고는 선수로 당장에 지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수가 되었읍니다. 운동 신경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 몸도 좋아 보이고. 운동삼아 열심히 해보려 합니다. 조금 재밌어요. 아마도 안경 때문에 시합은 안 나갈지 모르지만. 탁구도 치기 시작해 못 친다는 소리는 안들을 정도고. (조금 더 잘하지만은 현상 유지가 좋은 것 같읍니다.)


이번 토요일 정말로 광주를 가보고 싶었지만 부장님, 과장님의 명령 아닌 명령으로 야유회를 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지난번 편지에 꿈속에 누가 나타났는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합니다. 아직 나타나질 않았읍니다. 아마도 미선씨가 나를 보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기야 정심감응이라는 것이 있어서 멀리 있어도 함께 있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지만은 꿈에서나마 보고 싶은데 정성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하느님이 알아주질 않는 것 보면. 대신 기도해 주면 고맙겠읍니다.


그리고 답장 보낼 때 앞전 글 제목을 정했으면 보내요. 내가 생각하는 제목과 일치하는지 알아봅시다. 원고지에 적힌 것은 일전 이야기 했던 방송에 나갔던 글입니다. 미숙하지만 읽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건강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함께 하기를. 꿈속에서 봅시다.


“이름도 모르는 화초의 꽃이라는 것, 온실에 막 지려던 꽃잎을 딴 것임. 오래된 책을 넘기다가 발견했을 때 느끼는 진솔한 마음과 신선한 감동이 함께 하기를.”


- 기도 -


밤새 영혼의 이슬로 몸을 감고는

코 끝 흐르는 으슬한 밤을

품에 안고서 신의 샘물에 섰다.


온종일 햇빛으로 구워진

여린 생명을 달게 받으소서.

신화를 짓는 새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질 못합니다.


좁은 길 새벽 만난 이에게

어떤 신의 의지를 들려 줄수도

없지만 저의 숨결과 새벽의 한숨

마저도 받으소서 그리고.

돌아오기를, 부엉이 밤 눈 되서라도

한 줄기 빛 살 만이라도

제 옆 그림자에 함께 하기를


인간의 모습을 가슴에 품은,

스스로를 잃어버린 신이여


PS. 방송에 나간 글이 아닌 다른 것임. (방송에 나간 것을) 이야기하고 나서 적으려고 하니 원고가 광주에 있어요. 여기 가져온 것 중에 없군요. 외우고 있지 않아서 다른 글을 보냅니다.


삼천포에 있을 때 운흥사라는 절에서 밤늦게 혼자 있다가 적은 글입니다. 그곳에서 불공드리던 할머니를 보았어요. 적으면서 탈고한 곳도 다시 고쳐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대에게 보낼 글을 찾다 보니 이제까지 쓴 글들을 다시 봅니다. 아마 전부 태워버려야 할 것 같읍니다.


완성된 것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요. 일단의 시상의 나열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걸 깨우쳐주어 고맙읍니다.






이전 05화 늙는다는 것은 아마 생각의 기쁨을 가끔은 잊고 사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