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합니다 (6)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니 친구에게 캡처본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그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아침에.
굿모닝 J, 제발 어디 나갈 때 조심하렴.
"91, 92, 93, 94, 95 지역에 사는 모든 나의 renois와 rebeus에게 말한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중국인을 공격하자"
친구는 renois와 rebeus가 아랍어로 흑인이랑 아랍인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10월 30일부터 프랑스는 2차 락다운에 들어갔다. 해당 트윗은 코로나 감염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락다운 발표가 난 직후에 올라온 글이라고 했다.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곧 마감을 앞둔 리포트를 쓰느라 뉴스도 트위터도 보지 않았기에 몰랐다. 오늘은 잠시 산책을 하고 마트에 들러 주전부리를 사려고 했었다. 모든 걸 취소하고, 이번 주는 집에만 있겠다고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다행히 며칠 전 한인 마트, 중국 마트를 들렀기에 가득 차 있었다. 다행이다. 커피 캡슐도 한 줄 남아있었고, 샐러드랑 요거트가 떨어졌지만 지금 그게 대수인가. 내가 94 지역에 사는 데.
프랑스에서 중국인은 그들 눈에 아시아인처럼 생긴 모든 인간을 일컫는다. 당신이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문화에서 자랐고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어떤 여권을 가졌든 간에 그렇게 생겼으면 중국인이라는 게 정해진 답이다. 그저 어두운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고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길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니하오"는 기본이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에게 인사를 하듯이, 그저 낄낄대며 외친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안부인사를 받는 데, 주변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아 이 친구 참신하고 좋은 사람이구나하고 마음을 푸는 순간 어디서 뒤통수에 강펀치가 날아든다.
독일 친구가 자신의 친구를 데려온 날이었다. 백인에 금발인 친구는 아버지가 스리랑카 출신이라고 했다. 흑인이라고. 한 친구가 덧붙였다.
말도 안 돼. 아시아인이잖아. 불가능해.
...??
이 세상 어디에 흑인은 아시아에서 태어날 수 없다. 아시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흑인일 수 없다는 명제가 있었나. 그렇다. 내가 보지 못한 건 말도 안 되는 거고, 내가 알지 못한 건 불가능한 것이다. 풀자면 끝이 없고, 마음에 담아두면 살아갈 수 없다. 상처가 되는 말들도 그저 흘려보내는 법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에 교수에게도 인종차별을 받는다. 올 초에 일어나 벌벌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학과장에게 찾아갔던 나에겐 힘든 기억이었어서 "불편합니다" 시리즈에 꺼내지도 못했고, 꾸역꾸역 담아두기만 했었다. 이제는 그 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기에 곧 글로 풀어써야겠다.
말로만 후려치는 건 애교다. 언제 어디서 길거리를 걷다가 누군가에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면서 살아간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게 내 탓이 아니란 것도 그들이 잘못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저 운이 없어서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다 안다. 그래도 거꾸로 흐르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걸어 잠그고 되도록 나가지 않는 거라는 게 무기력으로 잡아끈다. 다른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이건 너무 역겹고, 절망적이라고.
"ça me dégoûte trop et ça me déprime beaucoup"
한 친구가 뱉은 말이 그대로 꽂혔다.
와 미쳤다. 솔직히 쫌 이상하긴 해. 혹시 fake news일수도 있잖아.
..? 닥쳐.
나의 세상이 나의 절망이 fake news로 여겨지는구나. 가짜 뉴스. 한 개인 아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이 그리고 그 두려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실제가 아니구나. 친한 친구이고, 그 친구가 가진 아픔도 잘 알고 있기에 상처가 더 컸다.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멍청한 사람들보다 그 친구가 뱉은 말이 더 아팠다. 울진 않았지만,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인 남성이 사는 세상은 내가 마주하는 세상이랑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이해가 됐다. 왜 내가 파리 북쪽으로 집을 찾지 않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cool하고 재밌는 게 많은 곳이 아닌 다들 왜 지루한 동네로 가냐는 말이 이해가 됐다. 여성인 친구들은 프랑스인이든 외국인이든 남쪽에 살거나 중심가에 산다. 살면서 한 번도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세상은 아름답고 꽃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기에 가짜 뉴스인 것이다. 그 감정은 그 두려움은 실제가 아니니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드높이는 목소리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다.
내가 느끼는 이 경험의 정당성마저 백인 남성이 결정하려고 하는 구나.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위협은 일상에 숨 쉬듯이 존재하는 차별은 숫자로 입증해야 하는 게 아니다. 당사자가 느낀 고통이 먼저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겪는 이 순간을 판단하는 게 그것을 격지 않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있기에 "가짜 뉴스"라는 단어를 가볍게 내뱉을 수 있던 것이다.
사회는 당신에게만 평화로웠고, 원래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관심을 갖지 않아서 몰랐던 겁니다.
제게는 늘 내전 상황이었던 것이 이제 전면전이 되었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
거꾸로 흐르는 분노. 절망. 슬픔. 어디까지 우리는 이 감정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데도 걱정과 분노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조심하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하라고. 아침에 메시지를 보낸 친구와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대화는 "fake news"라고 웃으면서 아픔을 승화시켰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긴 할까?"
"아니. 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살아온, 내가 자라온 세상은 내 삶이 소중한 만큼 네 삶도 소중하다고 배웠으니까. 네가 나를 아프게 해도 네가 어떤 사람이든지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하니까.... 근데 참 힘들다."
"어우 야 가짜 뉴스잖아. 세상은 꽃으로 가득하잖아. 아름답잖아. 그렇지?"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그녀와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우리는, 그저 서로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내어줄 뿐이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 감정이, 이 걱정이, 이 두려움이 우리에겐 새롭지 않다.
길거리를 걸으며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여성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느끼고,
언제든지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내가 더 조심하게 되는 건 프랑스에서 살아가면서도 느끼고,
혼자가 아니라고 네 옆엔 내가 있다고 말해주는 연대는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느낀다.
우리가 살면서 위협을 느끼지 않는 순간이 오긴 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편함으로 가득하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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