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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용운 Oct 18. 2022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던 S에게

2022.6.3 나미비아 에토샤 사파리에서

안녕 S! 요즘도 손톱을 자주 물어뜯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많거나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었어. 특히 엄마와 관련된 문제가 있을 땐 그 행동이 극심하게 나타났어. 가족 내에서 엄마의 힘이 막강했기에 넌 항상 엄마의 억압에 갇혀있는 것 같았어. 네가 손톱 물어뜯기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난 마음이 너무 아팠어. 난 너를 그 철창에서 꺼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정말 오만했지.



 S! 난 나미비아의 에토샤 사파리에 간다고 했어. 에토샤 국립공원 안에서 캠핑을 하면서 2박 3일 동안 자유롭게 뛰노는 야생동물을 볼 거라고 했어. 기린, 코끼리, 코뿔소를 볼 수 있어서 신난다고 했어. 넌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걸 왜 거기까지 가서 보냐고 했지. 요즘 동물원에도 사파리 시스템이 있다고.


 요즘 동물원을 안 가봐서 모르겠어. 요즘 동물원에서는 수십 마리의 얼룩말, 스프링복, 누, 오릭스, 코끼리, 기린 떼를 볼 수 있던가. 물론 보호구역을 지정해서 그 안에 캠핑장과 찻길을 만들어 놓은 건 에토샤 국립공원의 인위적인 면이긴 하지만 그곳의 동물들은 꽤나 자유로워 보였어. 가족들과 떨어질 필요 없이 무리 지어 생활할 수도 있고 본능에 따라 사냥도 할 수 있잖아. 치타도 봤는데 배가 고프지 않은지 앞에 있던 새끼 얼룩말을 잡아먹지 않더라고. 우린 얼룩말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치타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에토샤 사파리의 하이라이트는 큰 물웅덩이에 동물들이 물 마시러 오는 모습을 보는 거야. 밤이 되어 물웅덩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갔어. 벌써 코끼리 5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었어. 코끼리는 코로 물을 길어서 입에 넣더라. 물을 질질 흘리면서. 코끼리 무리가 나가더니 이번엔 코뿔소 2마리가 등장했어. 코뿔소는 동작이 엄청 느려서 한참을 고개 처박고 물만 마셨어. 그러다 코끼리 2마리가 또 들어왔어. 마치 공연에서 배우들이 무대에 하나둘씩 등장하는 느낌이었어. 나중에는 코끼리랑 코뿔소랑 영역 차지를 위해 싸우기도 했어. 그냥 동물이 물 먹는 모습인데 왜 그 모습이 그리 신비로웠는지 모르겠어.




 S! 동물원에 있는 동물은 안락할지도 몰라. 질병이나 다른 종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서 야생에 사는 동물보다 평균 수명이 높기도 하대. 굶을 일도 없을 것이고. 멸종 위기 보호종이나 다친 동물은 동물원에서 관리했다가 개체 수나 상태가 안정되면 야생으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니까. 그런데 공간이 제한되어 있고 비용 여건상 많은 무리를 수용할 수 없는 동물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은 가끔 상동 행동을 보이기도 한대. 같은 곳을 왔다 갔다 맴돌거나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자기 몸을 상처가 날 정도로 긁는 것과 같은 반복된 강박 행동이야. 이런 동물의 수명은 오히려 야생 동물보다 줄겠지.


사실 투어 당시에는 어떤 희귀한 동물을 발견하느냐에 초점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건대 사파리 투어의 핵심은 동물원이 구현할 수 없는 거대한 환경 안에서 동물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거였어. 종 내, 종 간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지.  



 현대 사회의 현대 교육을 받은 우리는 어쩌면 동물원에 있는 동물과도 같은 처지일지 모르겠어. 그래서 고작 야생동물들이 물 마시는 모습 따위에 감탄했는지 모르겠어. 우린 제한된 관계 속에서 몇 개의 역할에만 집중하여 움직이지. 그 안락한 관계에 나를 맞추느라 내가 어떤 상동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우린 더 많은 건강한 관계를 찾아다녔어야 했나 봐. 나 또한 익숙해진 관계 속에서 늘 내가 하던 습관대로 맴돌고만 있었어.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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