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9 이집트 카이로 숙소 옥상에서
안녕 H!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카이로의 숙소 앞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너를 배웅했던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아. 같이 여행했던 친구들 중에 넌 나이가 제일 어렸지. 우리 모두 나이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어떤 순간에선 우리가 너를 소외시키진 않았는지 모르겠어. 넌 너의 세계가 뚜렷했지. 우리가 못 보는 새 넌 혼자 다른 곳에 훌쩍 가버리는 경우가 많았어.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 그래서 너에게 더 마음이 갔던 것 같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넌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너의 세계를 잘 구축해가고 있었어. 그러다 감염병이 퍼졌고 그 속에서 넌 어떤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보였어. 너와 연락이 끊겼고 넌 너만의 세계에 들어갔지.
H! 카이로 기억나니. 공항에서 숙소까지 택시타고 가면서 본 풍경에 나는 감탄했어. 차선이 필요없는 무질서의 도로에서 사람들은 차 사이를 지나다녔어. 건물은 의외로 정갈하고 현대적이었지. 이슬람 모스크, 나일 강,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싸는 커다란 태양이 보였어. 그리고 숙소에 가까워지자 보이는 피라미드까지. 길거리에 무심하게 있는 피라미드가 신비로웠어. 우리가 숙소에 도착하자 주인은 우리를 방보다 먼저 옥상으로 안내했어. 주인은 계단을 오르는 우리에게 눈을 가리라고 했어. 옥상에 도착해서 눈을 뜨는데 눈앞에 큰 피라미드 3개가 떡하니 보였어. 마침 야간이라 불빛을 비추고 있었어. 스핑크스는 불을 켜야 겨우 보일 정도로 피라미드보다 훨씬 작았어.
우리는 카이로에서부터 룩소르, 아스완까지 내려가면서 고대 유적지를 구경했어. 잦은 지진과 테러, 이전 서구 열강의 침략이나 도굴꾼들의 도굴 때문에 문화재가 많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유적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지금의 피라미드도 사실은 훼손된 상태여서 윗부분만 반질반질하게 보이고 나머지 아랫부분은 네모난 돌이 울퉁불퉁하게 다 노출된 것이라고 해.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정부의 댐 건설 계획으로 수복될 위기에 처했다가 유네스코에 의해 이전되었다고 해. 지금도 이집트 땅 밑에는 파묻혀 있는 유적이 많다고 하니, 이곳은 참 경이로운 곳이야.
H! 이런 이집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네가 연상돼. 넌 혼란스럽고 충동적이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멋이 있어. 상처받았지만 유지된 너만의 세계가 있어. 아마 너도 너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겠지. 하지만 이집트의 태양처럼 널 감싸줄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있을 거야. 우리가 가까이서 함께 빛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유적과도 같은 존재니까.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