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더 빛나는 책] 백범일지 (김구 지음)
그는 겨울날에는 햇빛이었고, 한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었다.
이십 만권의 책 중 택한 한 권
이십 만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는 두 개 층의 중고 책방에 들렸다. 책 제목들이 낯익은 소설, 자기 계발, 에세이, 학습서로 가득하다. 해리 포터, 다빈치 코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무소유가 보인다.
중고 책방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를까? 한 번은 꼭 봤어야 하는 데 보지 못한 책. 그런 아쉬움이 있는 책을 집어 들게 마련이다. 내가 고른 한 권의 책은 ‘백범일지’이다.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김구의 자서전으로 두 아들에게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상·하권으로 작성한 것이다. 상권은 1929년(53세), 하권은 1942년(66세)에 쓰여졌다.
자서전은 사람의 만남과 이벤트의 연속이다. 그리고, 김구에게 있어서 어떤 계기들이 있어서 역사의 현장에 몸을 던졌는 지를 작성하였다. 그가 17살에 동학군에 처음 참여하게 되고,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의 집에서 고능선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1896년(20살)에 압록강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 육군 중위를 죽이는 데서, 그의 파란만장한 50년이 넘는 굴곡의 세월이 이어진다.
여러 번 바뀐 이름
우리가 아는 김구(金九)라는 이름은 1911년(35세) 그가 세 번째 투옥된 후 감옥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태어나서 김창암으로 불리다가, 17살에 김창수로 개명하였고,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 뒤 남쪽 생활로 도피 생활을 하다, 공주 마곡사에서 원종 스님이 되었다. 뒤에 그는 기독교로 전향하게 된다. 24살에 그는 이름을 김구 (金龜)로 바꾸었고, 경술국치 후 황해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17년형을 받은 후, 우리가 아는 김구(金九)로 바꾸었다.
그리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하였는 데, 백범의 의미는 이 나라의 백정과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 국민이 되겠다는 바램이었다.
스승을 만나다
19살에 유학자인 고능선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김창수가 과감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이를 길러 주기 위하여, 작은 나뭇가지에 연연하지 말고, 큰 일을 하라는 결단력을 가르쳤다.
·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得樹攀枝未足奇)
·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이다.
(懸崖撒手丈夫兒)
위 문구는 김구에게 있어서, 평생 실천하고자 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고능선 선생은 조선이 곧 일본에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관료들이 자기 몸 보전하기 위하여, 친러, 친미, 친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반드시 일본에 복수하고자 할 것이니, 청나라와 협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창수에게 청의 동향을 둘러보고 오라고 하여, 압록강을 건너갔다 오는 여행을 하였다.
임시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은 깊어만 간다.
김구는 1919년 임시정부 설립될 때, 경무국장, 1923년에 내무 총장, 그리고, 1927년에 국무령이 되었다. 김구가 국무령이 된 1927년 이전부터 임시정부는 점차 유명무실화되고 있었다. 100명도 안 되는 임시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계속 알리고, 미국과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보내게 하는 계기가 무엇일까? 일본 고위 관료 몇 명 죽인다고 하여 흐름이 바뀌지 않으니,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늦게 광복군을 창설하였고(1940년 9월), 임시정부에 대한 인정을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에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독립자금 1,000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과 연구 끝에 미국 동포들이 보내 온 독립자금 1,000달러 (현재 가치 2,000만원)를 가지고, 김구는 1932년 1월과 4월에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게 된다. 이후,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주, 남경, 장사, 쓰촨성, 그리고 중경으로 13년간 피난 생활을 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의미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은 자주독립 국가이고,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렸다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독립이 될 준비를 하였으나, 성과를 내기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해방이 되어 버렸다.
또한, 해방 후에도 김구는 통일된 한 국가가 되기를 바랐고, 대한민국이 미국의 한 주가 되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어머니는 참 놀라운 어른이다.
황해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35세)에 17년형을 선고 받고 어머니가 처음 면회 왔을 때, 어머니는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기쁘게 생각한다.”며 태연하게 말할 정도로 씩씩한 기질을 보였다.
1916년 형을 마치고 나와, 마을에서 김구를 위한 축하 잔치를 열었을 때, 어머니는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너가 술 먹고,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하였더냐?”로 아들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칠십이 넘으신 어머니의 생일에 청년단들이 돈을 모아 생일상을 차리고자 하였으나, 그 비용을 어머니를 달라고 하시고, 이에 돈을 더 보태시어 권총을 사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청년단에 주었다.
마음속의 빚
돌아보면 학창 시절 우리의 근대사와 현대사에 대하여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식민지 시절, 역사의 평가가 엇갈린다는 미명 하에 해방 직후, 근대화와 민주화 시절에 대하여 학교에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십만 권 중 백범일지를 택하게 된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던 빚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 있는 효창원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