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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07. 2024

2.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

부제: 신곡_인페르노(지옥) _제 1곡 도입

2.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부제: 신곡_인페르노(지옥) _제 1곡 도입


1. Read Me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서

정의의 길을 잃어버린

나는 어두운 숲에 있었다.


얼마나 설명하기 힘든 일인가!

이 숲이 얼마나 잔혹하고 혼란스러우며

통과하기에 힘든지를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풀이된다.


<신곡_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2. Note Me


1. 숲 속에 던져진 잔혹한 인생


AD 1370년 경 타지를 떠돌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단테는 <신곡>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던 내게도 그런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내 나이 9살 엄마와 아빠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 부모 사후 친지들의 관심은 오직 돈뿐, 철저한 무관심, 광기 속에 우리 두 형제는 어두운 숲 속으로 던져졌다. 하루 한 끼를 때우기 힘들었다. 동무들이 따뜻한 도시락을 먹을 때 나는 도시락이 없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학교 운동장 스탠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학교 운동장 수돗물을 들이켜면 굶주린 나의 내장은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다. 그 고통은 단지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삶의 근원이 사라져 버린 공포와 돌아갈 본향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적막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짙은 어두움. 나의 인생길의 시작은 누구보다 잔혹했고, 고통스러우며, 통과하기 힘든 지옥의 관문이었다.


어느 날 4살 터울의 형이 빨간 볼펜으로 눌러쓴 유언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어떤 연락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진 형을 찾아 며칠 밤낮을 헤맸다. 초원에 버려진 어린 야수의 새끼처럼 울어대면서.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가 경찰서에 잡혀있단다. 나는 아직도 그가 무슨 일로 경찰서까지 잡혀갔는지 모른다. 그저 세상에 이제 나만 존재한다는 고독과 공포에 며칠 밤을 울며 지새웠던 공포의 기억만 남아있다.


그제야 신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빈들의 버려진 마른풀과도 같은 어린 나이게 그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근처 교회 목사님이 우리의 소식을 아시고 집을 방문하셨다.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가물하지만, 나는 그 만남이 신이 내어준 구원의 손길이었다 생각한다. 예수가 산야의 작은 들꽃을 보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했던가? 오늘 있다 내일 아궁에 던져질 그 들풀도 입히신다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은 내게 만나와 메추리를 보내줬다. 근처 종합병원 신우회 회원인 간호사 누나들이 찾아왔다.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찬이라고 했다. 당시 읍사무소에서 두 달에 한번 40kg 쌀은 3 포대가 배급되었다. 쌀은 충분했다. 천사들은 매주 혹 격주로 찾아와 정성스럽게 반찬을 만들어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집도 안 간 20대 중 후반의 어린 누나들이었다. 나는 믿는다. 굶주리고 마르고 외롭고 괴로웠던 그 시절, 내게 신이 찾아왔다고….


그 어린 내가 경험한 많은 인간들을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인간들은 대부분 탐욕과 거짓, 위선에 찌든 악마 같은 존재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오직 신만이 나를 구원할 존재라 생각했다. 그를 갈망했고 그에게 귀의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영도에서 열린 학생 수련회에 참석했다. 마침 태풍이 왔다. 1만이 넘는 인파 속에 3박 4일 일정 중 3일을 쫄딱 비만 맞고 고생했다. 마지막 날 경배와 찬양 예배 중 찬양 인도자의 부름이 있었다. 13억의 중국, 10억의 인도, 수많은 무슬림과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아직도 신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다. ‘나 여기 있사오니, 열방 중에 나를 보내소서’


2. 정의와 진리의 길에서 미아가 되다

'인류의 복지와 평화'


그 후 나는 마치 수도사라도 된 것인 양 진지한 기독 청년으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책상 맡에 맡에 '인류의 복지와 평화'라는 문구를 붙여두고 항상 마음에 새겼다. 그것은 소외되고 가난한 열방을 구원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신학대학 진학을 결심하지만 먼저 신학생의 길을 걷고 있던 형의 만류로 좌절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 부름심이 있나? 부름심도 없이 무슨 용기로 주의 종이 될 것인가?”


나는 그의 질문 앞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신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차선으로 일반대학의 심리학 전공을 선택했다. 대학 4년 동안 기독학생회 활동을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기도모임에 거의 빠지 않고 참석하려 노력했다. 나는 매일 아침 신께 기도했다. 계시해 달라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신은 침묵했다. 내가 간절하면 더 간절할수록 신은 더 깊은 암흑 속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만 같았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서 성경, 교회사, 구약학, 신약학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많은 학문적 연구와 성과들은 배반과 배교의 교회사, 기만과 거짓의 기적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목사, 신학생, 동아리 선배들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고 도움을 구해 봤지만 아무도 나의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냉담한 시선과 의문의 눈초리로 나를 의심했다. 불신앙의 위험한 생각을 하는 분순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교회와 기독학생회 선후배들 사이에서 걱정과 경계의 기운이 넘어설 무렵 졸업반이 되었다. 후배들에게 나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들이 뒷담화로 전달됐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4학년 1학기쯤  영혼은 목말라갔고 나는 뼈만 남은 백골이 되는 신앙적 기아에 허덕였던 것이다. 4학년 2학기  무렵 나는 결론을 내린다.  이상 신의 계시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한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그러나 나는 죽지 못했다. 죽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을 하고 거의 반년을 고통 속에 살았다. 밤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괴로웠다. 그리고 2001 7 나는 군에 입대한다. 학사장교로 입대하고 거의 7개월을 장교 양성 교육 과정으로 보냈다. 군대는 생각할 틈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나를 굴렸다. 돌이켜보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다른 고통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의 분주한 삶이 나를 살렸다고 믿는다.


최근 단테 신곡의 지옥편을 읽으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인생의 숲이 얼마나 잔혹하고 혼란스러우며 통과하기에 힘든지를 아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더 잘 알고 싶었다. 그의 방황과 좌절과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그토록 바랬던 세상과 신과 인간에 대해 그가 무엇이라 증언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싶었다. 나는 이 아침 이 책을 이태리어 원문으로 읽기로 결심하고 배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신곡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대학 시절 매일 기도했던 것처럼, 차디찬 숲 속에 나를 던져두었던 그 신에게 매일 질문할 것이다. 이제 내게도 말씀해 주시겠냐고?!


3. Rememb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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