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사람들
2.
잡지를 창간한다는 공고가 벼룩시장에 나붙자,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곧 모여들었다. 발행인은 생각보다 빠른 직원모집에 솔직히 신기한 마음이었다. 구직자들은 단순히 일자리가 있음에 감사한 게 분명하지만 발행인은 자본의 위력에 새삼 흡족해졌다.
몇 군데 잡지사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편집장부터 자리가 메꿔졌다.
박편집장은 굵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안경너머에 순탄치 않았을 그의 삶을 숨기려는 듯 자주 눈을 내리깔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의 테스트 원고를 읽어 내려갈 때는 조용하던 박편집장의 눈빛이 종종 반짝이기도 했다. 어눌하고 느린 말투는 답답했지만 어른다운 매너와 한물간 위트도 곁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발행인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제가 부탁드려야죠, 이쪽 일이 만만치 않은데 투자를 하시고... 대단하십니다"
박편집장은 느릿한 말투로 인사했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란 게 있나요, 어디. 책 만드는 건 전 잘 모르는 일이니 잘 부탁드려야죠, 허허"
발행인의 여유로운 웃음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박편집장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편집장 자리가 채워지고 난 다음, 휑하던 잡지사 사무실에 점점 사람의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편집장의 심사를 통과한 취재기자 2명, 사진기자 1명, 광고사원 1명이 차례로 사무실의 자리를 메꾸었다.
냉소적 분위기를 풍기는 경력기자 안정식, 잡지사가 처음이지만 성실한 인상의 명진아, 카메라를 사랑하는 감성사진 정기자, 짧은 경력이지만 다부져 보이는 광고사원 김성호까지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모인 이들은 한 사무실에서 매달 잡지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첫날부터 명진아는 박편집장을 유심히 살폈다. 편집장의 성향이 그녀가 이 새로운 분야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명진아는 자신이 쓴 원고를 읽어본 후 자신을 향한 편집장의 말투가 좀 더 나긋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은 젊은 기자가 입사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편집장은 명진아에게 고쳐야 될 부분을 찬찬하게 설명해 주고 삭제할 부분도 완곡하게 지적해 주었다.
편집장의 첫인상은 무표정하고 느려 보였다. 대부분 말이 없었지만 업무지시를 할 때는 조곤조곤하게 설명하고 무뚝뚝한 이면에 매너도 있었다. 거칠거나 막돼먹은 상사는 아니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명진아는 여기서 일을 잘 배우고 경력을 멋지게 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잡지는 고향과 문화에 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도시가 지금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크고 번듯한 풍경이 익숙해 보이지만, 20년 전만 해도 도로나 건물들이 콘크리트로 점령되지 않았다. 사무실이 있는 이 동네만 해도 10년 전까지도 울퉁불퉁하게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 나지막한 건물과 시장통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큰 건물이 들어서고 도시가 번화해지면서 터전을 뺏긴 사람들은 도시 바깥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잡지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지만 아직 고향과 자신을 조용히 지키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누가 보아도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들과 시골 구석의 빛바랜 유물들을 찾아서 소개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자료들의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해석하기도 힘든 옛 글자들을 그나마 읽을 수 있게 뜯어고치는 작업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지역에서 이름 없이 묻혀 지내는 문화예술인들을 인터뷰하는 작업도 하기로 했다.
박편집장은 3-4군데 잡지사를 거쳐 왔다. 그가 거쳐온 크고 작은 잡지사들이 그의 경력이 되어주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의 이전 경력은 이력서를 채운 양만큼 그에게 자랑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박편집장 스스로도 보란 듯이 내놓을 스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때 작가의 꿈을 가졌던 편집장이 번듯한 경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은 우연히 첫발을 들인 잡지사에서의 뜻하지 않은 폐업을 맞이한 후부터 계속되었다. 지방의 잡지사가 대부분 그렇듯 열악한 재정상태로 몇 해를 버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잡지사는 그나마 지역에서도 알려진 곳이었지만 3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다. 첫 직장을 잃었을 때만 해도, 문학을 사랑하는 순수함과 잡지를 만들어 세상에 기여한다는 작은 희망이 아직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과정일 뿐이고 이제 더 열심히 하면 자신의 노력과 결과가 눈에 보일 것이라는 기대도 놓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고만고만한 잡지사들을 거쳤지만 그곳들 역시 짧은 기간에 문을 닫게 되면서 그의 꿈은 점점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아니 꿈이 있었던 건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햇수가 쌓여 편집장이라는 직함도 받았지만 그의 삶은 꿈꿨던 것만큼 빛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생명력을 잃고 지루하게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의지는 없고 삶이 밀어내는 대로 앞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다시 시작할 엄두도, 어디쯤에서 이 암울함을 탈출할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박편집장은 이 도시의 보잘것없고 탐욕적인 잡지책을 만드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잡지사 기자들끼리 술 한잔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에 꽂혀 답답하리만큼 한길만 고집해 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둔한 삶의 경로였다는 후회만 가득했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라 경제적 책임을 놓을 수 없어 그랬다 하더라도 최소한 스스로에게 너무 무책임하게 익숙한 길만 고집한 것은 아닐까. 지난 10년을 후회하면서도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도 자신은 똑같은 길을 반복했을 것 같았으니 무엇을 탓할 수도 없었다.
잡지사를 창간한다는 공고문을 봤을 때도 그는 사실 심드렁했다. 이전에도 겪었던 창간과 폐간의 과정을 또다시 반복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면서 영혼 없는 눈빛으로 공고문을 보았던 것이다.
지원서를 낸다면 늘 그랬듯이 그의 경력으로 너끈하게 편집장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시작은 있으되 끝을 미리 감지하면서 시작하는 일이라고 할까. 그에게 전혀 새로운 원동력도 에너지도 전달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박편집장은 삶의 끈을 잡은 손에 남은 힘을 주었다. 그는 어느새 창간 잡지사에 넣을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