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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l 12. 2024

세 번째 공황장애 발작

주말부부를 하면서

(세 번째 공황장애)



세상에 어떤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와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어떤 사람은 공황에 빠질까요? 그게 유리 멘탈이니 하는 그런 정신력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공황이 일어난 상황을 보면 전혀 그런 충격적인 어떤 강한 부딪침이 없었거든요. 모든 일은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서서히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질소가 터지듯, 수소가 터지듯 그렇게 하찮아 보이는 물질의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황은 15여 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와 아내는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어서 그런 부분이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출 이자에 대한 부담은 하루하루 화석이 겹쳐져 쌓이듯 그렇게 무의식에 농축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파주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원에서 생활하는 가족과 일주일간 떨어져 있다가 일주일만에 집에 가서 잠시 해후를 하고 다시 떠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파주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고시원에서 몇 달간 생활했습니다. 고시원 생활이 어떤지 잘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창문도 없고 벽 하나로 옆방과 구분되어 있어 옆집 텔레비전 소리가 다 들리고, 발 뻗고 누우면 딱 방이 끝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창문 하나가 달려 있으면 가격이 매우 비싸졌는데 저는 작은 창문 하나 달린 고시원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은 저의 졸시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시원으로 퇴근을 하자 벽에 집게벌레 한 마리가 기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집게벌레는 인간과 균형감각이 매우 다른 듯 직각으로 세워진 벽을 잘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렇지만 이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갈 길을 찾아 헤매이는 모습을 보자니 제 모습과 집게벌레가 겹쳐지고 하나가 되더군요. 그래서 자전적 명시 "집게벌레" 가 탄생했습니다.




<집게벌레>



집게벌레 한 마리 세상이 어떤지도 모른 채


누런 방 안으로 들어왔지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벽을 기어오르며 새로운


길 하나 찾고 있지



온통 벽뿐인데도 벌레는


앞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삶의 무게를 재곤 하지


미래의 흔적을 찾고 있지



고독의 벽이 깊어지는 시간


나도 벽으로 기어올라 갔지


집게벌레 앞에서 더는 갈 곳 없어


함께 울어버렸지



(2009년)



그렇게 세월을 버티며 하루하루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던 중 직장에서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과호흡이 밀려오면서 사지가 마비되는 증상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직원분들이 119를 불러 저를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과호흡과 함께 사지가 심하게 떨리고 공포가 밀려오면서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산소통을 옆에 놓고 코에 산소호흡기를 끼우고 안정제를 투여한 뒤 링거 하나를 맞게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할 게 없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저는 링거를 다 맞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가 퇴원을 했습니다. 그 즈음 저는 급여를 받을수록 마이너스가 되는 경제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을 저녁에 따로 만나 제 상황을 설명하고 아무래도 퇴사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퇴사를 한다고 해도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할수록 마이너스 상황이 되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당시 대표님의 저에 대한 신뢰는 매우 컸습니다. 회사 일은 물론이고 개인 가정적인 문제까지 저한테 의논할 정도였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제 얘기를 듣고는 제가 힘들어하는 부채액 일부를 빌려준다고 하면서 대신 탕감해주고 월급도 25%나 올려주는 파격적인 처우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계속 그 직장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호흡으로 사지 마비되는 상황이 계속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곳에서 2년 가량을 근무했는데 그날도 또 같은 상황이 생기고 병원으로 엠뷸란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더 이상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대표님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그런 증상이 있었는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아내는 깜짝 놀라 지인분과 함께 파주로 달려왔습니다. 아내는 병원에 누워있는 저를 그대로 차에 태우고는 수원으로 내려와 약간 규모가 있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저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고 침대 옆에는 기다란 산소통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조금 안정이 되자 간호사가 아내더러 이제 집에 가도 되겠다고 내일 입원에 필요한 옷가지랑 챙겨서 다시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랬는데 아내가 떠나고 15분이 채 지나자 않아 공황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간호사들은 깜짝 놀랐고 집으로 가던 아내를 다시 불렀습니다. 밤새 꼼짝하지 말고 환자를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간호사분들이 해야 할 일을 가족에게 맡깁니다.



그 병원에 한 달 가량을 입원했습니다. 병명을 찾기 위해 온갖 큰 병원에 협진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천근만근 제 가슴을 짓누르는 철판을 없애줄 병명은 찾질 못했습니다. 과호흡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으면 안정이 되었지만 제 가슴을 철판이 짓누르고 있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증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약을 주는지 몰랐지만 그 약을 먹으면 하루 정도 좋아졌다가 다시 안 좋아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검새 협진을 위해 ㅇㅇ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듣더니 의사 선생님이 아무래도 '공황장애'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난생 처음 듣는 질병 이름이었습니다. 폐쇄공포증 같은 말은 들었어도 '공황장애'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과 쪽으로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는 근 한 달 가량 있다가 퇴원을 했고 정신과 약 처방을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꽤 오랜 기간 취업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파주에서는 대표가 내려와서 계속 올라와서 일해주기를 부탁했지만, 아내는 단호했습니다. 주말부부 생활이 제 병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고, 또 옆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며 극구 반대하며 보내질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대표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고맙고 죄송합니다. 그 뒤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마음의 빚은 여전합니다. 참 잘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6개월 가량 시간이 흘러 저는 다시 취직을 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과호흡과 함께 사지가 떨리고 마비되는 공황 발작 증상은 꽤 심각했습니다.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알게 된 나의 무시무시한 세 번째 공황장애 이야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같이 근무했던 분들도 다 좋았는데, 파주라 너무 멀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추억으로 남겨두고 기억 속에서 즐거운 기운만 남겨두겠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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