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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28. 2024

1장. 희망눈금이 0을 가리킬 때

1장. 희망눈금이 0을 가리킬 때


삶이 바닥에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보나요.

엎드려 있다 해도 고개는 옆으로 돌리겠지요.

코를 땅에 박은 채 얼굴을 땅으로 향할 순 없으니까요.

고개를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돌리고 있으면 좀 낫습니다.

숨도 쉴 수 있고, 비스듬하지만 풍경도 볼 수 있으니까요.

손바닥도 바닥을 향하고 있으니

조금만 힘을 주어도

어쨌든 일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죠,

손바닥에, 손목에, 어깨에 힘을 줄 수 있고,

손바닥이, 손목이, 어깨가 힘을 받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바닥에 누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든 오른쪽으로 돌리든

손등이 바닥으로 향하도록 한 채

눈을 감고 있으면

희망눈금은 0을 가리키고 있는 때입니다.


손등으로는 힘을 줄 수 없고

눈을 감았으니 아무것도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희망마저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은 감은 게 아닙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면 눈앞이 환해집니다.

눈을 감았지만 느낄 수 있지요.

온기가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차가운 땅바닥에

햇살이 저 멀리 산등성을 성큼 넘어가 버리고 나면

날은 점점 추워지고 어두워지고

끝내 한 줄기 희미한 빛마저 사라져

암흑이 눈꺼풀을 완전히 뒤덮으면

앞도 뒤도 분간이 되지 않고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은 어둠뿐이라면


희망눈금은 0 아니 마이너스로 내려가 있는 때입니다.

내 인생에서 네 번째 공황장애가 찾아왔을 때

나는 그렇게 땅바닥에 손등을 바닥으로 향한 채

도무지 일어날 마음도, 기운도 없이

어둠 속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방 한 구석에 격리되어

음식물을 쟁반에 담아 넣어주던 때처럼

식사는 침대 위로 배달되었고

겨우 몇 술 뜬 식사는 다시 그대로

방문 밖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잠만 자고 싶다

잠만 자고 싶다

우울하고 싶다

우울하고 싶다

힘이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다


그렇게 소멸되어 갔습니다.

나는 이대로 죽는구나.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텅 빈 우물 아래로

새까만 우물 아래로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만 있었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겁니다.

그런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한없이 우물 아래로 추락하다가

간신히 두레박 줄을 잡고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요.


그렇다면 손을 놓지 마세요.

붙들고만 있어도 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는 존재니까요.

아래가 있는 한

계속 떨어지는 존재니까요.


일어선다는 건

그 떨어지는 속도와 힘.

중력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죽을 힘을 다해야 겨우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직 바닥에 있습니다.

바닥이어서 좋습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어둠이어서 좋습니다.

더 이상 어둡지 않을 거니까요.

그 안심에 빙그레 웃으며

눈물 한 방울 훔칩니다.

아직은 살아 있구나.

눈물이 흐르는 걸 보니

아직은

죽지 않았구나.


그러면 됐다.

내겐 신이 있으니까.

몸뚱아리라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살이 붙고 일어설 수 있을 거야.

희망눈금은 0이지만

그래서 슬프고 눈물이 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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