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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l 31.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1부 끝. 길을 건너다

환경생태동화

18. 길을 건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곧 해가 질 거라구요."

리초가 급하게 소리쳤습니다. 


"해바라기를 먼저 치워야겠군."

부들 박사가 신호등을 보며 말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덩굴도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자, 끈을 조이고 다시 신호대를 정비합시다. 쿨럭쿨럭.” 

올리 할아버지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건너편 뚜루 가족은 건너편 덩굴을, 그리고 이쪽 편 덩굴은 야리, 타랑 가족이 더욱 든든하게 묶었습니다.


“진짜 신호대 같아?” 

타랑은 몇 번이나 구구에게 물어보며 나뭇가지를 구부렸습니다. 부리가 큰 부들 박사도 거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는 사이에도 괴물들은 계속해서 씽씽 내달렸습니다. 아무도 동물들이 무얼 하는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다들 바쁘게 어디론가 달려만 갔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한 덕분에 다시금 근사한 신호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해님이 신호대에 걸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구구와 까치 부부, 부들 박사는 신호대 위에서 빙빙 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우 싸리네를 뺀 나머지 동물들은 도로 옆 공터에서 다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정말 멈추어 설까?"

리초는 은근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제 제가 날개를 흔들 때 봤지요? 녀석이 잠깐 멈칫했어요. 신호등을 봤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다같이 신호등을 알리면 분명히 멈추어 설 겁니다."

부들 박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자, 이번에는 두 단계로 일을 진행하자구. 지난 번처럼 부들 박사를 포함한 모든 새들이 신호등 아래에서 날개를 퍼덕여 신호등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거야. 쿨럭쿨럭 . 그러면 지난 번처럼 괴물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달리던 속도를 멈출 거야. 우리는 그 틈을 이용해야 해. 그 때 모두 도로 위로 올라가 다같이 신호등이 있다는 알리는 거지. 쿨럭쿨럭."

올리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동물들은 가족들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이번이 ‘죽기 아니면 살기’의 두 가지 중 마지막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무도 ‘실패하지 않을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빠진 식구들이 없는지 잘 살펴보세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습니다.     


"해님이 걸렸어요. 드디어 빨간 신호등이 만들어졌어요."

구구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까치 부부도 까악 까악 소리를 지르며 날아올랐습니다. 부들 박사도 신호대 주위를 힘차게 날기 시작했습니다. 빨간 해님은 정확히 덩굴 중앙에 걸려 있었습니다. 멋진 신호등이었습니다.     

부들 박사와 까치 부부, 산비둘기가 동시에 날아올랐습니다. 


부엉부엉.

까악까악.

구구구구.

새들은 힘껏 소리를 치며 날개를 흔들었습니다. 깃털이 우수수 도로 위로 떨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신호등을 지나던 괴물들이 갑작스런 소란에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다. 다같이 출발!"

드디어 올리 할아버지의 신호가 떨어졌습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동물들이 도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맨 앞에는 리초가 서고 그 다음에는 따오가 섰습니다. 동물들은 멈칫멈칫 쭈볏쭈볏 두리번두리번 어정쩡한 자세로 길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예 눈을 감은 채 아빠 손을 잡고 가는 동물도 있었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울면서 도로 위로 올라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리초는 절룩거리며 앞으로 조심조심 나아갔습니다.     


끽.

끼익.

끼끼익.     


아무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달려오던 괴물들은 갑작스럽게 동물들이 도로 위에 나타나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추어 섰습니다. 맨 앞의 괴물이 멈추어 서자 그 뒤를 이어 오던 괴물들도 계속해서 멈추어 섰습니다.

리초는 무섭게 달려오는 괴물을 보자 너무 겁이 나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리초가 걸음을 멈추자 다른 동물들도 모두 멈추어 섰습니다. 뒤따르던 동물들은 다리를 덜덜 떨었습니다. 어린 새끼들은 주위를 감싸는 불안감에 잉잉거리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리초는 어느새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다친 다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만 싶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괴물들이 달려들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 사슴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리초는 겁먹은 얼굴로 괴물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멈추어 선 괴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괴물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도로는 괴물 반 사람 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로에 모습을 드러낸  동물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다 뭔가를 대고는 찰칵찰칵 소리를 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귀에다 뭔가를 대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괴물들이 멈추어 서자 도로는 이제 괴물들로 길게 이어졌습니다.      


"리초. 뭐해. 놈들이 멈추어 섰어. 우리 신호등을 봤다구."

따오가 리초에게 속삭였습니다.

"눈을 깜박이는 게 빨리 건너가라는 신호인지도 몰라."

타랑이 답답한지 리초의 하얀 엉덩이를 툭툭 쳤습니다.

"다리가 떨려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요."

리초는 땀을 삐적삐적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빵 빵.

붕붕거리던 괴물들이 이제는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건너가. 안 그러면 달려들지 몰라."

앵초가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지금이야. 모두 건너요!"

기다리다 지친 따오가 소리치며 건너편 숲으로 뛰었습니다. 동물들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건너편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리초도 따오에게 떠밀려 건너편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타랑 가족, 오소리 가족도 건너갔습니다. 들쥐 까루 가족과 청설모 설마 가족이 졸졸졸 줄을 지어 건넜습니다. 토끼 앵초 가족과 앙띠 가족이 종종거리며 그 뒤를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올리 할아버지가 아직 공터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어서 건너오세요."

반대편에서 뚜루가 소리쳤습니다.

"빨리요. 해님 신호등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구요."

까치 부부도 안타까운 듯 할아버지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올리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놓고 온 것처럼 계속 공터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괴물들의 빵빵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곧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부스럭거리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얼른 고개를 돌렸습니다. 싸리 박사가 가족과 함께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어서 오게, 싸리 박사. 자넬 기다리고 있었네. 쿨럭."

"할아버지, 죄송해요."

싸리 박사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습니다.


"어서 건너세. 빨간 신호등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야."

올리 할아버지는 싸리 가족과 함께 마지막으로 길을 건넜습니다.      


해님도 산 아래로 가라앉고 동시에 빨간 신호등도 사라졌습니다. 괴물들도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은 새롭게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먹고 싶은 음식도 실컷 먹었습니다. 동물들은 두고두고 괴물들을 피해 길을 건너 온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리초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귓불이 빨개지지만 무사히 건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괴물들은 여전히 도로 위를 쌩쌩 지나다녔습니다. 괴물들은 도로 양쪽 나무에 왜 덩굴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하루에 한번씩 해님이 잠시 빨간 신호등이 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오소리숲에 보금자리를 꾸민 동물들은 해님이 나뭇가지에 걸릴 때마다 그 날의 모험을 떠올리며 새로 태어난 새끼들에게 열심히 모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오소리숲에 사는 동물들은 해님을 보면 언제나 ‘야, 빨간 신호등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빨간 신호등은 오늘도 오소리숲의 수호천사가 되어 아침마다 힘차게 떠올랐습니다. -끝-


(이번 회차로 1부 작품이 끝났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2부, 새로운 숲속에서의 생활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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