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희
[난설헌] 최문희
한줄평 : 이십 대 난설헌의 결혼 이후 삶을 조명한 가슴 아린 이야기
결혼 전 초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허엽 가문의 뛰어난 천재 난설헌.
손곡 이달의 문하생으로, 천재 소녀로 명성을 날리던 그녀의 삶은 14세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하면서부터 송두리째 사라지기 시작한다.
결혼 전, 초희의 어머니는 초희에게 공자 말씀을 가르치며 여자의 '삼종의 도'를 주지시킨다.
"공자님 말씀에, 여자는 사람들 앞에 구부리는 것이니, 삼종의 도가 있을 뿐이라고 하셨다. 집에서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 가면 남편을, 지아비 죽으면 자식을 좇아 잠시잠깐이라도 스스로 이루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했느니, 아예 서책 보기를 버리지 보듯 하는 게 좋을 게야." (57)
조선의 아녀자는 스스로 이루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그 말씀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책 읽고 글쓰기 좋아하는 아이에게 아예 서책 보기를 벌레 보듯 하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는 어머니의 그 심정은 어떨까.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고 계집질을 일삼는 서방이라는 자는 자신보다 뛰어난 학문을 갖춘 아내가 못내 밉기만 하다. 아니 그는 아내를 두려워했다.
최문희 작가의 허난설헌을 다룬 이 작품은 혼불문학상 1회 수상작품이다. 15만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작품성이 뛰어나고 독자에게 주는 여운도 크다.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 하였으니,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유교 사상에 깊이 파묻힌 조선 시대에 어찌 날개를 펼 수 있었으랴. 그가 죽은 뒤 남동생 허균을 통해 작품집이 묶여 남겨진 것이 우리에겐 축복일 따름이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 최순치를 등장시켜 남몰래 초희를 연모하는 관계를 설정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글들은 애틋하고 곱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먼 발치에서 초희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그의 마음은 또 어떨까.
불은 물을 뿌리면 끌 수 있지만
사랑은 불붙으면 끄기 어렵다
얼음은 녹지만 잃어버린 사랑은
그보다 더 차가워서
사람 마음속에 동상만 남긴다
건드릴수록 아프고 시리다 (44)
한때 허균의 실학사상에 심취해 허균에 관한 책을 조금 읽었다. 홍길동전은 물론이고 그의 선집, 허균에 대한 소설 등 구할 수 있는 책들을 구해서 읽었다.
허균 역시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형 허봉은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강원도 갑산으로 유배를 가고 3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38세의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초희의 어머니가 이때 난설헌에게 보낸 편지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어쩌다가 우리 허씨 가문이 이렇게 풍비박산 되었을꼬, 겪어내고 보아내며, 사는 날까지 욕되지 않게 조용히 자중하려 하였건만 세상의 입과 붓이 가만 있질 않는구나. 거푸거푸 달려드는 이 아프고 험난한 고비를 언제나 면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네가 사는 곳이 지척인데 이승과 저승처럼 멀고 아득하구나. (225)
마지막 '네가 사는 곳이 지척인데 이승과 저승처럼 멀고 아득하다'는 글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음에 동화되어 도대체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너무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이 세상에 배겨나지 못한다며 딸을 껴안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릴까. 남편도 객사하고 아들도 객사하고, 딸은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외면받고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이라니.
조선이 아닌 현세에 태어났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생각해본다. 오직 사람다운 삶만을 원했던 그녀. 시어머니의 모멸적인 행동에도, 두 자녀의 죽음 앞에서도 꿋꿋하게 마지막까지 붓을 들었던 그녀였지만, 오빠의 죽음 앞에서는 그만 무너지고 만다. 그녀 나이 27세 때이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인가. 허균에 의해 사후 발간된 문집은 한국사 최초로 여성 문학 작품집이 되었다.
사람다운 삶, 빛나는 문장, 그리움, 그 모든 것들을 가슴 안에 보듬고 살았다. 그것 없이는 살지 못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아니하고, 욕을 먹어도, 눈흘김을 당해도, 시어머니 송씨의 모멸적인 언사도 그미에게는 한낱 덧없는 흐름으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눈만 감으면 현실적인 존재감은 속절없이 무화되고, 선연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선경과 마주했다. (251)
그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세상을 떠난 후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직도 여성 차별이 대한민국에는 구조적으로 만연하다.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유교적 발상이 도처에 안개처럼 깔려 있다. 나 역시 그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제는 더 이상 난설헌 같은 아픈 죽음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