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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Mar 21. 2024

결핍을 채우는 맛

생라면에 뿌려먹는 라면수프,  짠맛

대학생 때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한 적이 있다. 여름 강릉 바다가 목적지였다. 한반도 지도를 왼쪽 끝에서 출발해 오른쪽 끝까지 가로지르는 일정이었다. 태백산맥 넘을 때만 좀 힘들겠지 나머지는 거의 평야일 테니깐 4~5일 정도. 이왕이면 횡성 평창 대관령보다는 제천, 정선이나 태백 쪽으로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어때?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20대 초반은 열정과 똘끼가 합리적 사고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아서 동의하는 멤버는 순식간에 정해졌다.


자전거 여행은 다들 초행인지라 짐이 가득했다. 누구는 짐칸에 텐트를 싣고 누구는 버너와 코펠을, 등에 진 배낭에도 짐이 한가득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부유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몸으로 때워야 하는 고통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 같이 겪는 고통은 이상한 유쾌함을 공유하게 했다. "야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진짜 멍청하네." "그러는 넌?" "아 맞다. 나도 그러네." "어휴 미친..." 이런 류의 의식.


7월 찌는 더위에 자전거를 타는 일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모자와 겉옷에 물을 흠뻑 뿌리고 달려야 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도시는 멀어지고 마을은 뜨문뜨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실 물이던 아이스크림이던 사려고 해도 마땅한 구멍가게를 찾기 쉽지 않았다. 오늘 계획한 목적지까지 가려면 계속 지체할 수도 없는 일. 그렇게 즐거움, 일탈, 동료애 같은 설렘으로 시작한 여행은 어느 순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용인을 지나 어느 즈음이었는지, 박달재를 너머 제천으로 가는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햇빛에 점점 호박색이 진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니 4~5시 정도 되었을까. 달리는 차들도 뜨문뜨문한 도로 한편에 다들 자전거를 멈추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순간을 자전거를 타고 전진했지만 뿌듯함은 없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고 기진맥진해서 다들 말이 없는 상태.


그때 누군가 라면 하나를 깨 부수었다.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가진 유일한 라면이었을 것이다. 생라면을 부셔서 수프를 넣고 흔들었다. 그리고 하나씩 꺼내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점점 붉은색이 짙어지는 햇빛, 검게 탄 피부, 땀으로 쩐내가 나는 옷, 자동차가 지나야 만 소음이 생길 정도로 한적한 도로, 자전거 가득한 짐들을 배경으로 우리는 주저앉아 라면수프와 생라면을 나눠먹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우적우적.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짠맛은 결핍을 채우는 맛이다. 단맛은 기분 좋게 하거나 기분 좋아지고 싶을 때 찾게 되는데 짠맛은 결핍을 채워준다. 짠맛의 기본 매력은 결핍의 충족에서 온다. 충분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만족스러우면 그 욕구가 더 생기지 않는다. 단맛은 먹으면 또 먹고 싶어 지는데 짠맛은 그 반대다. 생존의 맛이랄까.  


후들거리는 다리, 물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생라면 한 덩어리를 입에 욱여넣는다. 힘은 나는데 뭔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라면 수프를 함께 찍어먹어 본다. 이걸 제대로 끓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후회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한다. 내 몸에 비워진 곳을 채우는 듯 한 기분.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린 만큼 소금을 채워야 한다는 걸 그때 함께 달리던 친구들은 왜 다들 몰랐을까. 갈증 나면 물, 배고프면 밥.이라고 생각했던 단순한 녀석들. 그때 단순하고 무모한 정도만큼 저마다의 몸에서 짠맛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덕분에 라면 한 봉지로도 여럿이 생존의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짠맛이 가진 매력이 그때처럼 폭발한 적이 있었을까.

결핍을 채우는 순간, 하찮아 보이는 음식도 최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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