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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Apr 04. 2024

덕분에 맛있게 먹으며 지냅니다

맛있게 고기를 굽는 방법

친구와 뚜벅이 여행을 다닐 때 일이다. 해가 지고 나서야 목적지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식사 시간이 많이 지나서 허기가 밀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청춘들을 위한 최고의 식당이 영업 중이었다.  


"생삼겹이랑 된장찌개 주세요"

버너 위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익지 않은 고기를 뒤적거렸다. 내 쪽은 내가 뒤집고 친구 쪽은 친구가 뒤집고 그러다가 뒤집은 건지 애매하면 손 닿는 곳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뒤집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냥 고기가 익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잠시 후 우리를 보고 있던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네들 여행 왔나?"

"네" 

"어허, 고기 그렇게 구우면 안 돼"

여행 왔는지 물으면 어디에서 왔는지가 자연스러운 흐름일 텐데, 화제가 고기 굽기로 바로 넘어갔다. 사장님은 지역 사투리 억양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화가 나신 건지 모르겠지만 단호했다. 질문의 의도가 사람이 아니라 고기였다. 


우리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 되돌아볼 틈도 없이 사장님은 집게를 잡고 고기 앞에 서서 설명을 하셨다. 요약하자면 1. 고기를 많이 뒤집으면 안 된다. 2. 겉면에 핏빛 육즙이 올라올 때 한 번 뒤집어라. 여 보이지? 3. 그리고 다시 육즙이 올라올 때 또 뒤집어라. 이 때다 이때. 4. 이제 잘라서 먹으면 된다. 는 이야기였다. 아무렇게나 익혀먹으면 안 되냐며 농담하기에는 사장님의 기세가 너무 강했다. 더구나 사장님과 우리는 초면이었다. 그래서 "네, 아, 그렇네요"라는 말만 추임새로 넣으며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장님의 조언대로 구워진 고기는 우리가 뒤적거리며 굽던 고기보다 훨씬 더 맛이 있었다. 어쩌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기 굽는 기술은 사장님 덕분에 다른 지역보다 조금 더 뛰어날 것 같고, 맛있는 고기를 맛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그날 배운 기술은 직장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삼겹살, 목살 등으로 회식하는 날이면 나는 으레 집게와 가위를 잡고 있었다. "네가 굽는 고기가 맛있어!"라는 칭찬을 기대해서도 아니고 고기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도전의식도 아니었다. 어차피 다들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고기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육즙이 올라오기 전에 자꾸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기 어려웠다. '조금만 더 기다리다 뒤집으면 더 맛있는데, 지금 안 자르면 타서 뻑뻑할 텐데.' 예전에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장님을 통해 내가 경험한 소리, 모습, 맛이 있어서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회식의 자리가 많아질수록 갈고닦은 기술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졌다. 정교함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칼이 된 듯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칼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고기를 굽는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닐 테니까.


여자친구와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도 호기롭게 집게와 가위를 잡았다. 고기는 여러 번 뒤집으면 안 되고 육즙이 나올 때 한 번만 뒤집으면 된다는 비기를 여자친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불판을 바라보며 필살의 뒤집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자꾸 탄 냄새와 고기 타는 연기가 올라왔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이모님, 여기 불판 좀 빨리 갈아주세요."


불판과 고기는 이미 갈색으로 타버리고 있었다. 이모님께서는 불판을 갈면서 돼지갈비는 양념이 되어 있으니 타지 않게 자주 뒤집어줘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불도 계속 세면 안된다고 하셨다. 그날 나는 고기의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며 여자친구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돼지갈비인데 이렇게 태우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수백의 전쟁 터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 준 내 검이 강한 방패에 부딪혀 부러진 느낌이었다. 


지인들과 야외에서 만났을 때도 비슷했다. 캠핑 화로에 숯을 넣고 그릴을 얹고 고기를 놓았다. 돼지갈비가 아니라 두꺼운 생고기이니깐 예전의 비법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고기에서 떨어지는 기름이 숯에 닿자마자 불이 화르르 올랐다. 불에 닿은 부분은 과하게 익고 안에는 덜 익고, 불에 닿지 않은 부분은 검게 그을음이 묻고... 이건 고기를 어떻게 뒤집느냐가 아니라 숯불의 기운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야 고기를 제대로 구울 수 있었다. 


세상에는 한 가지 칼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중식도도 필요하고 과일 깎는 칼도 필요하고 고기를 정형하는 칼도 필요하다. 균일한 불판, 양념되어 있지 않은 두껍지 않은 생고기, 다루기 쉬운 불 조절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사장님은 존엄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우연찮게 사사받았다. 마치 무협의 주인공처럼. 하지만 이제 무림을 모두 평정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타버린 돼지갈비와 겉은 웰던과 스모크 훈연, 속은 아직 레어인 캠핑용 고기를 마주하니, 나의 편협함과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요즘에도 고기를 구우면 여전히 집게와 가위를 내가 잡는다. 이유는 예전과 다르다. 그냥 고기를 굽는 게 재밌고 좋아서, 이왕 누가 구워야 한다면 내가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서이다. 사장님을 통해 익힌 기술은 결국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중요하다. 정해진 방식은 없다. 불의 세기, 양념의 종류, 고기의 상태, 날씨, 기분, 함께 곁들이는 음식...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지. 게다가 집게와 가위를 내가 잡으면 맛있는 고기를 먹을 확률이 높아진다. 딱 "이 순간이야!" 할 때 불판에서 한 점 집어먹는 그 맛. 아무리 잘 구워 접시에 담아 사람들에게 전해주어도 그 맛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다들, 빨리 와서 이거 한 점 먹고 가"라고 외칠 수 있는 건 고기를 굽는 사람의 권한이다. 그 외침을 위해 내가 가장 맛있는 한 점을 먼저 맛보아도 다들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그때 그 상황에서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유일한 한 점! 

그것을 감내하려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기 굽기를 대하는 겸손함이 필요한 것이었나 보다. 


아, 사장님! 당신의 뜻은 이것이었나요. 

제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잘 구운 한 점을 드셔보시지도 않고 이제 먹으면 된다며 뒤돌아 가버리신 건가요. 


사장님, 덕분에 지금도 맛있게 먹으며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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