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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Mar 28. 2024

나는 이제 짬뽕

삶의 분기점으로 충분한 선택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끊어지지 않은 긴 줄에 비유하자면 누구나 줄 위에 어느 지점에선가 전후로 구분하는 분기점을 새겨간다. 그게 삶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표시하느냐는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다양하겠지만 반대로 세상에서 겪는 일 속에서 영향을 받으니 일견 비슷하기도 할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어떤 사건, 자신의 다짐과 변화처럼.


그중 하나가 음식일 수도 있다. 특히 짬뽕은 삶의 분절점 중 하나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음식의 맛 때문이 아니라 음식을 선택하는 행위 때문이다. 짬뽕은 맵고 짜고 자극적이다. 음식을 떠올렸을 때 맵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면발까지 물든 매운맛. 짬뽕은 매운맛 말고도 접근하기 까다로운 게 많다. 잘못 먹으면 옷에 국물이 튀고, 천천히 먹으면 면이 불어 처음 맛보다 덜해지고, 익어서 살캉한 식감을 잃어가는 채소가 면이나 해산물과 함께 입에 들어갔을 때 다소 찝찝한 느낌을 주고, 배달을 시키면 수저는 없고 식당에서 먹어도 수저 쓰기가 좀 꺼려지고 그렇다고 후루룩 마시기에는 물냉면 같지 않은 음식.


짬뽕을 선택한다는 건 한 입만 맛보고 결정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골랐고 그러니 식사 중에 끝까지 이 음식을 책임진다, 이 음식과 싸워보겠다는  표현이다. 어린 시절 식당에서 처음 짬뽕을 먹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나도 이제 그 정도 수준이 되었다는 독립 선언이기도 하다. 달짝지근한 짜장과 바삭하고 새콤달콤한 탕수육이 있는데도, 함께 식사하는 누구도 먼저 추천하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하는 도전의 맛.


짬뽕을 경험하는 일은 이소 준비를 하는 어린 새가 둥지 밖으로 나와 날아가는 연습을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어른의 세계로 타자에 의해 던져지는 게 아니다. 둥지 안에서 보호받으며 때가 될 때까지 성장한 후에 밖으로 나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는다. 부모 새가 간섭하지 않고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다. 주변에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날갯짓을 해보고 균형을 잡아보고 주변을 살핀다. 한 번 뛰어내리면서 푸드덕거려 본다. 예상보다 쉽게 성공하기도 하고 반대로 크고 작은 실패를 겪기도 한다. 날기 연습을 성공하게 되면 부모가 가져다주는 안전한 먹이를 떠나 스스로 다양한 먹이를 찾는다. 그렇게 아이가 스스로 찾아낸 세계의 맛 중 하나가 짬뽕이다.


그래서 짬뽕을 보면 내가 이 음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키우고 돌봐준 울타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짬뽕 먹을래"라는 말에 "짬뽕? 매워. 그냥 짜장 먹어"가 아니라 "짬뽕?" 하고 잠시 놀람과 걱정의 눈길을 주고 그냥 별말 없이 주문에 동의해 주던 그런 날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면 짬뽕을 향한 도전은 아마 훨씬 더 늦춰지거나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 협궤 열차를 타고 소래포구에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저녁 열차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했다. 바닷가에 왔으니 해산물 가득 들어간 짬뽕을 먹어야 한다고 아버지가 이야기했는지 온 가족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건지 몰라도 어쨌든 저녁은 중화요리였다. 나는 짬뽕을 주문했다. 누구도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살던 동네와 다르게 짬뽕에 해산물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반주를 드셨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옆에 앉고 나는 아버지 옆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짬뽕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 조금씩 독립이 가능했던 걸까.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 협궤 열차 안으로 일몰을 앞둔 빛이 가득 들어왔다. 천천히 덜컹거리는 소리에 맞춰 객실은 옅은 노랑에서 주황색으로 그리고 다홍색으로 채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노을의 빛은 짬뽕 국물색과 비슷했다. 그날 열차 안은 온통 짬뽕으로 가득했나 보다. 저녁 메뉴와 잘 맞는 순간이었고 가족 나들이었음이 분명했다. 사는 건 그렇게 짬뽕을 선택하고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말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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