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밖에서 틀을 기웃대기
엊그제엔 『사주가 MBTI를 만나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아무래도 사주나 MBTI나 둘 다 어떤 인간을 분석하고 규정하는데 유용한 도구여서인지 이 둘을 엮은 콘텐츠가 자꾸 눈에 띈다.
이 책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관성 사주’라고 하면 사주팔자를 이루는 여덟 개의 글자 중 관성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주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 무관성은 애초에 관성에 따르지 않는 기질을 타고난 것이니 세상 누구도 이 사람이 남의 말을 강제로 듣게 할 수 없다.
무관성인 사람은 확신의 P다. P는 수직적인 문화를 좋아하지 않고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관성과 상통한다.
…아, 저는 무관성이지만 확신의 J라니까요?
저자 선생님이 나 같은 사람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실지도 모르겠다. “정말 J 맞아요?” 네, 맞습니다. 사주 원국은 물론이고 지장간까지 들여다봐도 관성이 한 톨도 없는 저, J 맞아요.
MBTI의 J와 P를 가르는 질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특성은 ‘계획 vs 무계획’이다. 사주에서 관성이 없는 사람을 ‘확신의 P’라고 정의한 것은 아마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플래너를 잘 쓰지 않는다. 할 일이나 일정은 핸드폰에 기록해 두는데 사실 그마저도 가끔 건너뛸 때가 많다. 하지만 단언컨대 중요한 일정이나 약속을 잊어서 곤란을 겪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릿속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세워두고 그대로 움직이는 편이다. 세세하게 시간 단위로 일정을 정리해 두기보다는 큰 덩어리로 구조를 나눠 둔다. 이러면 약간의 변수가 생겨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이 흐름이 깨지면 불편해진다. 가령 친구가 당일 만남을 권해온다든가, 아니면 느닷없는 요청으로 오늘 안에 재빨리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 같은 것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틀을 만들되 일정 부분의 빈틈을 두고 살아간다. 내가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내 계획에 균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스파클이 될 수 있도록. 이건 무관성을 타고난 내가 J로 살아가며 얻은 세상과의 타협점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것이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이제는 잘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고등학생 시절 ‘시간표 담당’을 맡았던 적이 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교무실에 들러 그날그날 변동된 시간표를 확인하고 반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내가 맡게 되어 1년 내내 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에도 규정된 틀 속에 가끔 끼어들 수 있는 변동 상황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게 편했나 보다. 혼란이 생기기 전에 질서를 먼저 정리해 두는 일. 삶이 늘 그렇듯 내 뜻대로는 되지 않아도 언제나 작은 미봉책 하나는 마련해 두는 것.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이 닥쳐도 일단 나 자신부터 안심시키기 위해 내가 실천하는 작은 행위들이 지금의 ‘무관성이지만 J로 살아가는’ 나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스템과 규율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관성 사주는 이처럼 정해진 틀과 구조에 본능적인 이질감을 느낀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대체로 학교 교칙을 잘 따르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도 어느 날 갑자기 ‘이건 좀 아닌데?’ 싶은 생각으로 돌발 행동을 감행한 적이 있다. 통제 속에서 살아가던 J의 껍질을 깨고 무관성이라는 본모습이 불쑥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사진: Unsplash의 lilart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