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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적이지만 계획대로만 살지는 않습니다

얼레벌레 Mbti J가 여행계획을 세우는 법

by 바란

MBTI J인 나는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게 불안하다. 여행을 떠날 때도 예외는 아니다. P인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때면 나는 자연스레 대부분의 준비를 도맡게 된다.


숙소와 교통편을 미리 알아보고, 방문할 장소와 식당을 미리 추려 최적의 루트를 짜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P인 친구들은 내게 계획 짜는 게 힘들지 않느냐며, 내게 모두 맡기는 것 같다고 미안해하지만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즐겁기만 하다. 여행을 마친 뒤, 친구들이 덕분에 편하게 다녔다고 말해줄 때면 뿌듯함이 두 배로 돌아온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한 J’의 모드로 임하지는 않는다. 나보다 더 철저한 J가 있는 그룹에서는 그 사람의 계획을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나는 상대적으로 J가 되기도, P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나도 아무런 계획 없이 여행이 있다. 바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이때는 교통편과 숙소만 예약해 두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출발한다.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즉흥적으로 좀 더 마음이 끌리는 곳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누구도 내게 어디 가거나 무엇을 먹자고 말하지 않는,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결정만으로 구성되는 여행. 나는 이런 자유가 참 좋다.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혼자 여행하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사실 심심할 틈이 없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혼자일 땐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 보이는 낯선 풍경, 사소한 볼거리에 긴 시간을 들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정해진 일정이 없기에 내 마음이 정한 시간만큼 마음껏 머물러도 된다.


여행이란 어차피 비일상을 경험하러 가는 일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계획 없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비일상이 된다. 때문에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움직이는 게 내게는 오히려 특별한 일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정형성’ 유형의 여행이 있다. 계획은 세웠지만, 실상은 즉흥성이 더 가미된 부모님과의 여행이다. 작년 부모님과 오사카 자유 여행을 떠났을 때 특히 그랬다. 미리 1안부터 3안까지 철저히 루트를 짰지만, 사실 그 계획이 모두 실현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식당은 아예 정해두지 않은 채였다. 부모님이 당일 어떤 음식을 원하실지 알 수 없기도 했고, 긴 줄을 서야 하는 맛집보다는 기다리지 않고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부모님 입장에서는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당의 웨이팅이라는 변수는 애초에 계획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더 그랬다.


전체적인 일정은 정해 두었지만, 여행 내내 세세한 부분은 그때그때 조율하며 움직였다. 여행 중간에 부모님이 피곤해하셔서 호텔에 돌아와 낮잠을 잔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낮잠 시간은 계획표에 없었고, 이후 일정은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부모님과 나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고, 큰 트러블 없이 여행을 마무리했다. 아빠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 네가 어떻게 그 복잡한 오사카 전철을 헤매지도 않고 잘 찾아 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라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계획표를 짜고 미리 대비를 한다. 여행이든, 인생이든 마찬가지다. 이건 내가 J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계획표를 불변의 진리로 삼고 애써 붙들고 있진 않는다. 계획이라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언제든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삶을 살아오는 내내 깨달았다. 계획이 어긋나는 순간 당황은 하겠지만, 얼마든지 조율하고 고치면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꼭 계획대로 흘러가야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계획이 어그러진 덕분에 뜻하지 않게 가게 된 장소가 인생 여행지가 될 수도 있지 않는가. 인생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어떤 큰 방향을 정해 두긴 하지만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게 안되면 다 끝이다’라고 좌절하기 전에, ‘그렇다면 이참에 이것저것 해보자’는 곁가지를 쳐보는 것이다.


그렇게 뻗어 나간 곁가지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브런치북 연재 역시 내가 뻗어본 곁가지 중 하나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는 일엔 어떠한 정답도 오답도 없다.


나의 계획표는 말하자면 고체가 아니라 액체에 가깝다. 어디든 흐를 수 있고, 아니다 싶으면 물길을 다시 틀면 된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체득한 이런 유연함이 어쩌면 내가 무관사주인 J로 살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흐르되 아예 흩어지지는 않는 방식으로. 나는 그렇게 나만의 길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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