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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계절을 건너 다시 이름으로

'바라는 마음'이 피워낸 여정의 끝

by 바란

이제 이 브런치북 연재는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이 브런치북 시리즈는 오행의 상극(相剋)을 따라 나라는 사람을 들여다본 글이다.


오행에는 서로를 도와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상생(相生)의 관계도 있지만, 충돌하고 부딪치는 상극(相剋)의 구조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상생이 아닌 상극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해 왔다. 서로 상처 입히며 다음으로 나아가는 힘을 토대로 글을 쓴 이유는, 결국 극(剋)의 관계가 내가 지나온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삶을 매끄럽고 부드럽게 연결되는 서사로 풀어가는 대신, 정면으로 부딪치며 갈라진 틈새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시작된 서술이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는 힘보다는, 충돌하여 깨어진 부스러기를 줍는 과정이 나를 자라게 했다.


그래서 토(土)에서 시작해 토(土)를 극하는 수(水), 수(水)를 극하는 화(火)… 이런 방식으로 금(金)과 목(木)을 건너와 다시 토(土)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모든 극(剋)을 건너왔으니 모든 계절을 건너온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심을 잡기 어려운 건 생이라는 것이 어쩌면 평생 흔들리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완결이 아닌 귀환이다. 나에게서 출발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 이 모든 극(剋)의 단계를 건너온 나를 스스로 토닥이는 과정인 것이다.


상극의 구조를 따라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쌓인 무수한 균열들과 마주해야 했다. 차마 매만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지난 나날을 너그럽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를 향해 비명을 지르는 과거의 ‘나’들이 날을 세워 나를 찌르는 것을 아프게 자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고통만이 지난날의 나를 잠식하진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안에는 환희도, 전진도 언제나 함께 있었음이 다시 보였다.


내게 이 글쓰기는 일종의 통과의례였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다음 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것.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묵은 상처와 감정을 정리하는 개인적인 의식을 치러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니 결국 극(剋)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나는 파괴와 충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심연에 닿아, 쪼그라들어 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조심스레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내가 과연 ‘쓸 수 있는 사람’인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운 좋게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두렵기도 했다. 읽히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을 계속 써나가는 데엔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다.


그래서 브런치북 주소를 ‘beflint’로 정했다. flint, 부싯돌. 나라는 흙 안에서 구르는 세 개의 돌덩어리가 있다면, 이걸 서로 부딪치게 해서라도 불을 지펴보자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깨지고 부스러지더라도, 그 조각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작은 불씨를 붙들어야만 했다. 외부에서 불어올 불의 기운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스스로 지핀 불꽃으로 언젠가 제대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싶었다.


때문에 나는 이 글을 ‘바란’이라는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바란이라는 이름에는 내가 이 글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무언가를 ‘바라다’는 동사의 뜻 그대로,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써 나갔다. 바란이라는 이름으로 몇 편의 글이 쌓일 수 있었던 건 이름의 의미가 나를 쓸 수 있게 하는 동력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바란’이라는 이름은 단지 바람이나 소망만의 의미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balance’에서 온 이 이름은 극(剋)과 충돌을 지나 내 인생을 조율하고자 하는 마음, 혼란 속에서도 나만의 중심을 잡으려는 의지 역시 담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란 결국 나를 기울게 했던 경험과 감정들을 문장으로 고르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란이라는 이름, 즉 나의 본래 이름이 아닌 필명의 외피를 입고 내 모든 것을 다 낱낱이 드러내겠다는 결심은 결국 반쯤만 이루어졌다. 이 글은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보일 글’이었다. 브런치북에 연재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혼잣말이 아닌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만을 나열하고, 나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글은 큰 의미가 없다. 독자들은 누군가가 쓴 문장에서 자신과 비슷한 결을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읽을 것이다.


내 글쓰기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어떠한 응답을 바라기보다 내 안에서 오래 묵었던 것들을 꺼내 놓는 일방향의 고백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글쓰기가 무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나를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과정일 테니.


내 고백은 과연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내 글쓰기가 허공에 흩어지는 독백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가 나 자신,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기에. 그러니 ‘바란’이라는 이름은 나를 감추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나를 가장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바란’은 도피가 아니라 용기였다. 내 안에서 몰아치던 혼란을 ‘바란’을 통해 정리하고, 깨어지던 시간들을 쓰다듬으며 여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 ‘바란’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나는 ‘바란’ 뒤에 숨어 있던 나의 본래 이름을 내보이려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와 함께 삶의 굴곡을 통과해 온 내 이름이 더는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침내, 다음 편에서 나는 그 이름을 또렷하게 호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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