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의 나에게 쓰는 편지
안녕.
넌 어떤 말이 듣고 싶을까. 삼십 대의 나는 이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십 대의 네 옆에 가만히 서 본다. 차마 너와 마주 보지는 못하겠으니까.
네 옆에 나란히 선 채 너의 초조한 듯 불안하게 오므라드는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너의 눈길이 닿는 곳에 나도 시선을 따라가 본다. 안 봐도 알겠어. 네 눈동자는 꽤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쎄, 떨리는 네 손을 가만히 잡아 주는 것 정도일까. 섣불리 포옹 같은 걸 시도했다가 너는 나를 밀쳐낼지도 모른다. 그때의 너, 아니 그때의 나는 그랬을 거야.
알고 있어. 네가 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너의 생채기에 섬세하게 연고를 바르고 정성스레 반창고를 붙여주는 손길만을 원했지. 네 스스로 너의 다친 자리를 차마 보지 못했으니까. 누군가가 너를 매만져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너는 홀로 울다가, 또 가끔 웃다가, 이내 시간을 죽이는 것만이 정답임을 알고 그저 거기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너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이제 너도 서서히 깨닫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 네 삶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 되리라는 걸 알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하지만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너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귀를 막고 악악 소리를 지르겠지. 이해해. 너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러지 않고서는 그 시간들을 지나올 수가 없었을 테니.
칼을 쥐고 있던 소녀. 너의 그림을 떠올려본다.
나는 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너의 마음을 가늠해 보려다가, 결국에는 한때의 치기로 치부하며 묻어두고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다. 네가 써놓은 일기 속에 그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 낸 것도 최근의 일. 20년을 묵은 빛바랜 문장 몇 줄에 너의 뾰족뾰족한 마음이 다 담기진 못했을 테지. 그러나 켜켜이 쌓인 시간을 파헤쳐 너에게 다시 손을 뻗는 지금, 다시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너에게 미안해졌어. 나는 이 오랜 시간 동안 너를 진정으로 껴안지 못했었구나. 어차피 네 손에 들린 칼로 누군가를 찌를 수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너의 칼은 날도 세우지 못한 채 가만히, 그저 가만히 있다가… 결국 너 자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음을, 너는 몰랐겠지. 이제야 이걸 알아버린 나는 칼자루를 네게서 빼앗지도 못했어.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을 네게 그 해는 세 겹의 칼날이 네 안에서 휘몰아치던 때였어.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니었다. 너를 끈질기게 옭아매던 지독한 외로움, 근원적으로 도무지 해결이 안 될 것 같았던 상실감, 그런 것들은 네 탓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어. 모든 나쁜 우연과 운이 겹쳤을 뿐이라고.
네 모든 걸 걸며 시도했던 일들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고, 너 자신에게 도무지 너그러워지지 못했던 나날들을 견뎌야만 했으니 그건 네게 형벌이었을까.
하지만 너도 알잖아. 그때 너를 둘러싼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모든 문제는 네 스스로 네 마음을 베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었다는 걸. 원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어버린 일들의 연속에서 너는 구원을 바라고 있었지. 그러나 그런 건 네게 결국 도달하지 못했어. 네가 그렇게 갈구하던 행복, 소울 메이트. 없었어. 네게 오지 않았어.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있어.
너를 속 시끄럽게 했던 그 모든 소용돌이, 세 자루의 칼이 챙챙 소리를 내며 네 마음을 휘젓던 와중에도 너는 문장을 썼으니까. 그 모든 불안함, 절망, 패배감을 끌어안으면서 글을 쓴 네 덕분에 이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나는 네게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바란아, 생은 때때로 뜻하지 않게 구역질이 나기도 하지만 또 이상한 지점에서 찬란하게 눈부시기도 해. 그 모두가 너를 웅크린 씨앗에서 땅 밖으로 밀어내는 양분이 될 거야.
그러니 조금만 버티어 줘. 너의 불완전함과 너의 미숙함 모두를 진정으로 공감해 줄 단 한 사람이 된 나는 너와 마주 서서, 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수 있게 됐어. 너로부터 스무 해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네 안에서 들끓던 그 감정들이 이제 생을 단련하는 힘이 되어주었다고. 네가 칼날을 쥐고, 흩뿌리듯 도려냈던 언어의 조각들을 이제 정돈된 문장으로 끼워놓을 정도로 자랄 수 있었다고.
바란아.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을 부르며 너를 칭하는 게 낯설긴 하지만 아마 이 이야기가 끝날 때엔 너를 제대로 호명할 수 있을 거야. 서른일곱 해를 살아온 내 이름으로. 그러면 너 역시 나를 똑바로 볼 수 있겠지. 그날까지 나는 또 힘껏 써 볼게. 네가 들었던 칼을 펜으로 다시 쥐면서. 새기듯 쓰는 문장 위에서 우리는 발을 맞추어 걸어갈 수 있을 거야.
네가 살아낼, 그리고 내가 살아온 스무 해의 시간은 실패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었음을 같이 증명해보지 않을래?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불러줘. 더는 네게서 달아나지 않을게. 너를 외면하지 않을게.
사랑한다.
온 마음을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