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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모든 언어는 나의 이름이었다

均禧 : 고르게 다듬어 복이 머무르기를

by 바란

브런치에 내 본명을 쓰지 않았던 건, 나를 아는 누군가가 우연히 내 글을 읽게 되었을 때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정체성을 두루뭉술하게 감추고, 필명이라는 가면을 쓴 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드러내기 망설여졌던 내 부끄러운 면모는 필명에 가려졌고, 그 덕분에 나는 나의 바닥 끝까지 나를 밀어붙이며 솔직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필명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낸 시간들, 흔들리고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마음은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분명 진실했다. 이제는 이 투명한 진심을 품고 정말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마무리되는 지금 마침내 내 이름을 꺼내 보이기로 했다.


‘바란’은 내 본명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그 의미를 고스란히 담은 이름이었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 이름을 ‘balance’에서 가져왔다. balance는 내 본래 이름이 지닌 뜻과 깊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고를 균(均)과 복 희(禧)를 쓴다.


하필 균(菌)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어릴 적엔 온갖 벌레 이름이 별명으로 따라붙기도 했다. 어쨌든 여자 이름으로 잘 쓰지 않는 균(均)이라는 글자가, 그것도 이름 중간에 있어 내 이름은 흔치 않은 이름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김 씨 성에, 여자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희’를 가지고도 ‘균’이라는 글자 때문에 내 이름의 전체적인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균은 돌림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균’이라는 글자를 가지게 된 걸까. 할아버지는 왜 하필 ‘균’이라는 글자를 넣어 내 이름을 지어주신 걸까.


‘균’이라는 글자의 특이성을 차치하고도, 왜 ‘고르다’라는 뜻이어야만 했는지 나는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고르다’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이 다 높낮이, 크기, 양 따위의 차이 없이 한결같다’이다. ‘균(均)’이라는 글자 자체가 평균이나 중간, 그 애매한 지점 아닌가. 복을 의미하는 희(禧)가 있으니 차라리 ‘많다’는 뜻을 지닌 글자가 좋지 않을까? ‘고른 복’보다는 ‘많은 복’이 여러모로 더 나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아끼면서도, ‘고르다’는 뜻을 지닌 탓에 어쩐지 늘 어중간하게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명리에 능통하셨던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니 감사하게 여기긴 했지만, 균(均)이라는 글자가 내 이름 가운데에 박힌 것은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직접 여쭈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명리학을 공부하게 되면서부터 내 이름에 왜 균(均)이 들어가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기토(己土) 일간으로 태어났다. 기토는 논밭처럼 한정된 크기의 땅, 생명을 품고 키워낼 수 있지만 외부의 기운에 쉽게 흔들리는 흙이다. 물이 넘쳐 들어오면 쓸리고, 햇볕이 지나치면 갈라지고, 예리한 날붙이에 쉽게 베이고, 나무뿌리에 파헤쳐진다.


그러니 기토에게는 무엇보다도 균형이 필요하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정성껏 다뤄야 한다. 밭갈이하듯 치우침 없이 고르고 또 고르며 살아야 하는데, 내 기토는 타고난 기운이 약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균(均)은 내 삶의 지향점을 관통하는 글자였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기울기 쉬운 삶 속에서 치우치지 않고 스스로를 ‘고르게’ 다듬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이름에 ‘균(均)’이라는 글자를 넣으셨을 것이다.


알고 보니 ‘복 희(禧)’ 역시 이름에 흔히 쓰이는 글자는 아니었다. 희(禧)는 단순히 ‘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경사스러움’, ‘경건함’의 뜻도 함께 품고 있다. 禧 속에 있는 示(보일 시)는 제사와 신의 뜻을 상징하는 부수로, 희(禧)는 그저 얻어지는 복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복’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내 이름의 희(禧)는 단순히 많이 얻을수록 좋은 복이 아니라, 다듬어진 마음에 고루 스며들어 나라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복이다. 나의 삶을 먼저 정갈하게 가꾸지 않으면 이 복은 내게 머물 수 없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을 지켜낸 삶에서만 축복처럼 내려올 복.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복을 받기 위해 나를 ‘고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균(均) 없이 희(禧)는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중심을 잡고(均), 그 끝에 도래할 복(禧)을 기다리는 내 삶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나를 ‘고르게’ 다듬고 펴는 것, 마치 평균대 위에 서서 신중하게,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조심조심 걸어가는 과정. 바로 그것이 ‘균희(均禧)’라는 이름을 품고 살아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가 살아낼 삶이 들쭉날쭉하게 나를 뒤흔들지라도, 나는 내 자리에서 글을 쓰며 가만히 나의 중심을 다져갈 것이다.


나는 생이 끝날 때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아 ‘쓰는 일’로 나의 이름 석 자 ‘김균희’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평생 기다리던 ‘복(禧)’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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