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은 초등학교 시기에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발달을 촉진합니다. 우선 발달 관련 이론을 통해 초등학교 시기에 어떤 발달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살펴볼게요. 에릭슨(Erik H. Erikson)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 발달은 일련의 단계를 거쳐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단계는 총 8단계로 나눠지는데, 단계마다 해결해야 하는 발달과제가 있습니다. 단계별 발달과제를 잘 해결하면 적응적인 특성과 덕목을 가질 수 있지만, 발달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부적응적 특성을 갖게 됩니다.
초등학교 시기는 에릭슨이 제시한 발달단계 중 네 번째 단계인 ‘근면성 대 열등감’ 단계에 해당합니다. 에릭슨은 이 시기를 자아 성장의 전환기이자 사회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단계로 보기도 했어요. 자아 성장의 전환기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두시고, 이어서 설명드릴게요. ‘근면성 대 열등감’ 단계의 발달과제를 간단하게 말하면 ‘학습과 적응’입니다. 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나 잘하고 있어!’라는 유능감을 발달시키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하고, 규칙을 잘 지키고, 친구와 잘 지내는 모습을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서 근면성과 유능감이 발달합니다. 그러나 학습에 실패하거나 또래와의 놀이에서 배제되는 경험은 아이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갖게 하지요.
보드게임은 초등학생의 발달과제인 학습과 적응, 그리고 자아 성장을 돕는데 유용합니다. 보드게임을 할 때 어떤 능력을 사용하게 되는지 생각해 볼까요? 우선 보드게임을 시작하려면 규칙을 배워야 합니다. 배운 규칙을 잘 기억하면서 적용도 해야 하고요.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사고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배우고, 기억해서 적용하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모두 학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보드게임을 할 때 필요한 능력은 충동을 조절하고 갈등에 대처하는 능력이에요. 게임은 기본적으로 경쟁 구도가 있기 때문에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반칙을 해볼까' 하는 충동이 일어나기 쉽고, 상황에 몰입하다 보면 상대방과 갈등이 생기기도 쉽죠. 그렇기 때문에 보드게임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조절능력과 갈등대처능력이 필요해요. 조절과 갈등대처능력은 적응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학습과 적응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아(ego)입니다. 승패가 나뉘는 게임과정에서 오는 여러 자극을 받아들이고 패배했을 때의 좌절감을 기꺼이 견디는 일,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현실에 맞게 조절하는 일 모두에 자아가 관여하고 있어요.
자아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요. 그래서 자아가 제 기능을 잘하는 사람은 대체로 일상에 잘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자아의 기능이기도 한 좌절감내, 갈등대처, 충동조절 능력은 일상을 적응적으로 살아가는 데도 필수적이니까요. 인간의 성격 발달에서 자아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기능 수준을 높이는 것이 심리상담에서 중요한 목표가 되기도 해요.
자아의 기능을 떠올려보면, 자아의 성장이 학교적응과도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부 자극을 견디고, 충동을 현실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학교에서 지켜야 할 많은 규칙을 지키고, 하기 싫은 공부를 기꺼이 하고, 복잡한 친구관계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 에릭슨이 초등학교 시기를 자아 성장의 전환기라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정리해 보면, 보드게임은 자아의 기능을 훈련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며, 자아기능의 발달은 초등학생의 발달과제인 '학습과 적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지발달 측면에서 보아도 보드게임은 초등학생이 가지고 놀기에 적합한 놀이 도구입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에 따르면 인지발달은 크게 4단계로 이루어지고, 초등학교 시기는 그중 구체적 조작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발달하고, 그 이전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거예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역할 놀이를 하는 식으로 가상놀이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구체적 조작기에 진입하면서부터는 가상놀이보다는 조금 더 실제적이고, 규칙과 순서가 있는 놀이를 선호하기 시작해요. 인지적으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고, 규칙을 내면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면서 자신의 인지발달 수준에 맞는 놀이를 찾게 되기 때문이에요. 가상놀이보다는 구조화된 놀이가 전략적 사고를 사용하는데 더 적합하겠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에는 여전히 가상 놀이를 하기도 합니다만, 그전보다 협동적이고 규칙이 등장하는 가상놀이를 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규칙과 순서가 있는 구조화된 놀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보드게임이에요.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측해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게임에서 패배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일상에서 아이들이 실패를 경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를 투영해서 보여줍니다. 격하게 화를 내거나, 함께 게임을 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는 식의 대처를 하는 아이들은 아직 자아강도가 약하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어요. 이럴 때 흔들림 없이 아이들의 행동과 마음을 읽어주고, 적절한 반응을 모델링해주면서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했을 때 새로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보드게임에서 지면 격하게 화를 내던 아이가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다음번에 다시 잘하면 돼”라고 이야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아이가 잘하고 있는 부분, 노력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해서 알려줍니다. 그럼 아이는 다시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숙달을 계속해서 시험해 보고 연습해 봅니다. 그렇게 상담실에서의 시행착오가 끝날 때쯤이면 일상에서의 변화도 시작됩니다. 시행착오가 끝났다는 것은 자아가 잘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고, 자아가 잘 기능하기 시작하면 적응적인 일상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